이제 유럽여행도 중반에 접어들었습니다.
2013년 4월도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고 점점 여행에 적응력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스위스 국경을 넘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중간에 4차선에서 2차선으로 좁아지기 때문에 차량을 통제하는데 차들이 많아
몇킬로는 서있는 것입니다.
터널의 길이가 20킬로가 넘는다고 합니다.
스위스는 터널이 많다보니 세계적으로 터널공법이 발전되어 세계로 수출한다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집니다.
밀라노에 도착하는 시간이 많이 늦었습니다.
저도 옛날에 밀라노에 왔던적이 있어 생소한 곳이 아니지만 기억이 안납니다.
그저 스위스보다는 지저분한 느낌만 남아있었습니다.
이곳에도 큰 성당이 있어 그곳을 늦은시간에 관람하고 외곽에 있는 호텔에
투숙하였습니다.
오래된 10여층정도의 호텔인데 시설이 최신이 아니라 에레베이터도 속도도
느리고 사용하기 불편하더군요.
인터넷은 느리지만 그런대로 사용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피사의 사탑을 관광하기 위해 출발합니다.
30년전 로마에 왔을때 피사를 보고 싶었는데 그곳에서 이곳에 가려고 기차와
버스편을 물어보니 시간이 많이 걸려 포기하고 나중에 아내와 같이오리라
결심했었습니다.
이제야 소원이 이뤄지는 셈입니다.
30년의 약속이 이제야 지켜지니 저절로 기분이 좋아지고 행복해지더군요.
이제 이태리 여행의 시작은 로마 근교 호텔에서 시작됩니다.
로마에서 한시간 반정도 걸리는 외곽지역 FIUGGI의 호텔에서 이태리여행을 3일동안
하도록 되어있습니다.
시골동네 이다보니 인터넷 시설도 되어있지않고 와이파이도 물론 터지지
않는것이 가장 불편한 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내부시설이야 그런대로 괜찮은 편인데 인터넷이 보편화 되어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날씨는 가끔 구름만 조금 있고 햇빛이 내려오는 더운 날씨입니다.
이탈리아는 독재자 무솔이니가 세계2차전쟁에서 독일과 연합하여 싸웠으나
패한 이후 한동안 경제가 어려웠으나 금방 회복되었습니다.
국민소득 3만5천불되는 소득수준은 이런 관광산업과 자동차산업, 그리고
고급패션의 의료산업의 발전은 이태리 경제의 원동력입니다.
이들의 문화유산에 자유로운 사고방식의 교육이 명품 디자인 산업의 기초가
되지않았나 생각되어집니다.
피사의 사탑...
전에 이태리 로마에 왔을때 가보려고 길을 물어보니 만만치 않아서 포기한 적이 있습니다.
이제 그 가보고 싶었던 피사로 향했습니다.
이곳도 역시 집시들이 소매치기를 노리고 앉아있다고 하며 가이드는 단단히 주의를 주었습니다.
다행히 그들도 오늘은 휴일인지 길거리에서 보이지 않았습니다.
점점 기울어지는 피사를 세우려 여러작업을 했다고 합니다.
이제는 4.5도 기울어진 상태로 유지를 하고 있는데 세울수도 있지만 세우지 않는다고 합니다.
세워지면 관광객들이 찾아오지 않으니깐...
생각보다 피사의 사탑은 웅장했습니다.
앞에 있는 성당과 함께 종탑으로 건설한 걸로 추측이 됩니다.
날씨가 너무 좋아서 관광하기에는 최고의 날씨였습니다.
4월말의 유럽 이태리의 날씨는 우리나라의 5월중순의 날씨가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피사의 사탑 관광을 마치고 로마쪽으로 향합니다.
피사에서 로마까지는 5-6시간 정도 걸립니다.
fuggui라는 도시의 호텔에서 여장을 풀고 로마여행을 준비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로마관광을 시작하려고 시내로 가는데 두시간정도 걸리기 때문에 일찍 출발했습니다.
로마 바티칸성당을 관광하려고 근처에서 내렸지만 길고 긴 줄에 놀랐습니다.
세계각국에서 온 사람들로 입장하려 하는 사람들로 몇시간을 기다려 줄을 서야만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새치기 해주는 업도 이곳에 있어 인도쪽 얼굴을 한 사람들이 피켙을 들고 줄주위를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1시간 반이상을 기다려 바티칸에 들어가 검색대를 통과하고 바디칸박물관을
우선 관람하였습니다.
인파에 파묻혀 그 인파가 가는 곳으로 흘러가는 식의 사람파도 관람...
바티칸 박물관의 작품은 미켈란젤로라는 예술가의 작품관람이 주를 이룹니다.
오백년전 바티칸교황의 전속화가였던 미켈란젤로는 성당내부의 전정과 벽화그림을
혼자서 몇 년에 걸쳐 완성하였다고 합니다.
오랫동안 천정을 보고 작업을 하다보니 각종 작업병에 걸린 미켈란젤로...
그래도 80정도 살았다고 합니다.
이태리 로마 성당 유적지 몇군데를 둘러보면 그의 작품이 최고의 작품으로
관광상품이 되어 많은 사람들이 천재화가 미켈란젤로의 명성을 확인하기위해
찾아오는 것 같습니다.
이태리를 바티칸 관광하는데는 무솔리니를 떠올리지 않을수 없습니다.
바티칸 소국이 독립하는데는 무솔리니가 관련되어있습니다.
무솔리니의 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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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토 무솔리니(1883~ 1945)
베니토 무솔리니(Benito Mussolini)는 파시즘을 주도한 이탈리아의 독재자 였다.
그는 국가 파시스트당을 창당하였고 1922년 이후 이탈리아 왕국의 국무총리였다.
1925년부터 무솔리니는 최고통치자를 뜻하는 두체(Duce)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
1936년 이후 무솔리니의 공식칭호는 "정부 수반이자 파시즘의 두체이며
제국의 설립자이신 불세출의 베니토 무솔리니였다.
또한 무솔리니는 스스로 제국 제일 원수 계급을 제정하고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와 함께 이 칭호를 사용하여 이탈리아군의 통수권을 행사하였다.
1943년 연합국에 패배한 후 도주하여 망명 정부인 이탈리아 사회주의 공화국을 세우고 그 수반이 되었다.
무솔리니는 국가주의,협동조합주의,생디칼리즘,팽창주의,사회진화론,반공주의와 같은 다양한 정치 이념들을 조합하여 이탈리아 파시즘을 만들었다.
그는 공산주의자들의 체제 전복 시도를 막기 위한 검열의 필요성을 선전하였다.
1924년부터 1939년까지 무솔리니는 폰티네 습지의 개간과 같은 공공사업과 대중교통을 위한 기반시설 확충 등을 통해 일자리를 늘리고
경제를 성장시키는 성과를 보였으며
이탈리아 제국 전반의 경제적 안정을 실현하였다. 또한 라테란 조약을 통해 로마 문제라 불리던 로마와 바티칸 시국 사이의 문제를 해결하였다.
이와 같은 업적으로 무솔리니는 대중적 지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무솔리니는 1935년 독일을 견제하기 위한 프랑스 이탈리아 조약을 채결하는 등
프랑스에 우호적인 입장을 보였으나 1940년에 들어 외교적 위치를 바꾸어 추축국의 일원으로 가입하였다.
추축국의 일원으로 제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고 1943년 연합국에 패배한 뒤 도주하여 망명정부를 세웠으나 1945년 공산주의
파르티잔들에게 체포되어 총살되었다.
그는 이탈리아 해군을 자랑하였지만 현실적으로 이탈리아 해군은 함대를 운용할 연료조차 불충분 하였다.
1941년 2월 이탈리아는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지도 반년 정도 지난때
개전 이후부터 이탈리아의 전쟁은 시행착오와 재앙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시행착오와 재앙은 육, 해, 공 삼군 중
그나마 가장 준비가 잘 되어있다고 평가되었던 해군 역시 그 재앙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무솔리니는 이탈리아 해군을 선전하였지만, 현실적으로 이탈리아 해군이 개전 이후 보여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1941년 11월 11일 저녁은 이탈리아인들에게는 잊을수 없는 밤이 되었다.
궁핍한 국고를 지원하여 마련했었던 이탈리아 해군은 영국 해군의 구식 뇌격기
소오드 피쉬 12대에 의해서 순식간에 괴멸되어 버린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무솔리니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는 카톨릭이었다.
당시 교황이었던 피우스 11세는 1922년 “무솔리니는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는 지도자”라고 극찬까지 했었다.
그래서인지 무솔리니 선거에서 승리했다.
교황이 무솔리니의 손을 들어준 이유는 막대한 경제, 정치적 거래 때문이었다.
이들 사이에서 1929년 2월11일 교황이 다스리는 바티칸을 독립국가로 인정하는 라테란 조약이 맺어졌다.
이에 따라 바티칸 궁전과 라테란 궁전, 그리고 그 부속지 등을 소유하는 바티칸 市라는 독립국가가 탄생했다.
바티칸 市는 이탈리아에 대한 세금을 모두 면제 받았다.
게다가 옛 교황령과 재산을 포기하는 대가로 이탈리아로부터 보상금 7억5천만 리라와
연 5%의 이익이 보장된 이탈리아 공채를 받았다.
카톨릭의 나라에서 교황청의 후광을 입은 무솔리니의 파워는 막강했다.
1945년 4월25일 反파쇼 의용군(이탈리아 빨치산)에게 체포된 후 무솔리니는 총살형을 선고받았지만
그의 정부(情婦)인 클라라는 총살당하지 않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소위 사랑하는 무솔리니와 함께 죽겠다고 애원했다.
참고로 클라라는 성관계가 문란했던 무솔리니보다 29살이나 젊었다.
1945년 4월28일 총알이 무솔리니를 향해 발사되었을 때 클라라는 온몸을 던져 무솔리니를 감싸 안았다.
클라라가 죽고 난 뒤 무솔리니는 9발의 총을 맞고 사망했다.
두 사람의 시신은 이후 밀라노로 옮겨졌다.
사람들은 죽은 무솔리니의 얼굴에 오줌을 누었다.
한 여인은 자신의 살해당한 다섯 자녀의 복수를 위해 무솔리니의 시신에 총을 다섯 차례에 걸쳐 쐈다.
마침내, 두 사람의 훼손된 시체는 모두가 볼 수 있도록 거꾸로 매달렸다.
군중들은 수 시간에 걸쳐 비웃음을 던지고 무솔리니의 시체에 침을 뱉었다.
그 다음 날 무솔리니의 시신은 프레다포에 있는 가족묘에 묻혔다.
사람을 많이 죽인 독재자에 대해서는 무자비할 필요가 있다.
자유라는 나무는 때때로 애국자와 독재자의 피를 필요로 한다.
이는 자유의 근본 속성이자 거름이기도 하다.
역사적으로나 현재나 사악한 인간들의 속성중의 한가지는
자기가 지은 죄를 덮어버리기 위하여
또 다른 죄를 저지르며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고 인권 탄압을 가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러한 인간들의 부류는 죽는날까지 자기 자신이 저지른 죄악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죽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인류는 한세월을 지속적으로 살아오면서 여러국가, 여러 단체에 존재하는 수많은 독재자와
그 사회에서 어떤 형태로 이든지 사악한 형태의 범죄를 저지르는 나쁜 무리들을 누누히 보아왔다.
비록 그러한 죄업이 자기대에서 드러나지 않더라도 언제나 역사의 올바른 평가는
객관적인 사실에 기인한 형태로 후대에 두고 두고 회자가 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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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은 무솔리니의 일생을 살펴보았습니다.
로마는 옛 로마제국의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있고 아직도 발굴중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로마를 지붕없는 박물관이라고 합니다.
전유럽을 지배했던 로마의 제국의 강력한 권력상징들은 대리석으로 지어져
지금까지 내려오는 것 같습니다.
중국이나 일본 한국같은 동양의 나라들은 나무들로 자연의 환경에 취약해서
오랫동안 보존이 되지않았습니다.
유럽의 문화재 건물들은 대부분 돌로 된 건축물이다보니 천년이 지나도
아직도 흔적이 남아 관광상품이 되어 후손들이 먹고사는 것입니다.
특히 로마는 가는 곳곳이 그런 문화재로 사람들이 붐빕니다.
로마의 휴일이라는 영화 때문에 더욱더 유명해져 영화에서 나왔던 곳은
더욱더 인파가 몰려옵니다.
흑백영화로 오느리햇번과 그레고리팩이 주연하여 로마의 유적지를 돌아
보며 로멘스 스토리가 사람들을 감동하게 만들어 그 흔적을 몇십년이
지나도 이곳을 찾아오게 만드는 것입니다.
작품의 위대성이 곧 관광상품이 되는 사례를 보여주었습니다.
겨울연가처럼 일본사람들이 그 작품에 반해서 한국에 관광을 오듯이
동서양사람들이 로마의 휴일의 흔적을 찾아 사람들이 찾아옵니다.
로마시내관광은 벤투어로 했습니다.
7명씩 벤츠벤을 타고 로마의 휴일에서 갔던 곳을 그대로 다녔습니다.
벤투어를 하면서 오느리햇번이 먹었던 곤젤라또 아이스크림도 사먹고
스페인광장계단에 앉아도 보았습니다.
트레비분수에 앉아 동전도 던져 보며 모처럼 여유도 부려보았습니다.
옛날 카톨릭의 총본산인 바티칸 시국으로 시작해서 벤투어로 로마의
여러 유적지를 둘러보았습니다.
로마의 상징은 콜로세움을 끝으로 벤투어는 끝이나고 로마의 관광도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지만, 감동으로 인한 강한 맥박은 계속 뛰었습니다.
30여년전에 혼자와서 잠깐 둘러본 여행과는 차원이 다른 역사여행이라
생각되어지기에 가슴이 뿌듯합니다.
로마는 고대도시입니다.
시내가 몇백년전,아니 몇천년전의 건물 그대로 보존되어있다는 사실, 교과서에서만
보았던 내용을 현실로 본다는 것이 신기하기그지없었습니다.
사람들만 현대사람들이지 옛날 건물 그대로 보존되어 옛 마차가 다니던
길을 차가 다닐뿐입니다.
로마제국이 유럽전체를 지배하는 동안 얼마나 번성했던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로마사람들의 자부심도 대단하겠지요.
프랑스나 이태리 유럽의 사람들은 옛날 건물들을 쉽게 부수고 재개발을 하지
않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했기 때문에 옛것을 보기위해 사람들이 몰려오는 것입니다.
호텔로 돌아오니 파김치가 되어버렸습니다.
관광도 체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증명됩니다.
나이가 70정도의 체력이라면 견뎌내기 힘든 여행이라 생각되어집니다.
이태리여행 3일째는 품베이화산 유적지입니다.
나폴리외곽에 있는 품베이는 우연히 주변의 하수도 공사를 하던중
유물이 나오기 시작하여 파보기 시작하니 거대한 고대도시였다는 것이
증명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지금도 발굴중으로 있다고 합니다.
다음날 아침 호텔에서 일찍 출발했습니다.
호텔에서 두시간반을 달려간 품베이 화산 유적지...
품베이 화산은 서기75년에 폭팔했다고 합니다.
올해가 2013년이니 이천년이 거의 되는 셈입니다.
사람들이 대피를 하지않고 처음에는 처음보는 광경을 구경하다가 화산재와
돌덩이가 나오기 날아오기 시작하자 대피하기 시작했지만 늦어겠지요.
화산재와 돌이 10미터 이상 쌓이면서 고대도시는 사라졌습니다.
거의 2천년전의 도시가 하루아침에 땅속으로 사라진 것입니다.
화산으로 사람이 돌로 변한 모습도 발굴했다고 합니다.
그때의 생활방식을 알수있는 여러 가지 유적들을 살펴보았습니다.
목욕탕도 있었고 목욕탕에는 남녀구별하여 현재와 같은 방법으로
목욕을 한 흔적이 있었습니다.
가장 흥미로운 것은 그때도 몸을 파는 여인들이 있어 돌로 남자의
성기로 조각해 놓았으며 안으로 들어가면 그림까지 그려져 있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2천년전의 생활이나 지금의 생활 많이 변했지만 의식주에 있었서는
크게 변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품베이 화산유적지를 보고 소렌토로 전철을 타고 이동했습니다.
우리나라 전철과 비슷한 그런 교통시스뎀을 갖고 있습니다.
소렌토는 학교 음악시간에 모두 배운 돌아오라 소렌토라는 노래로
모두에게 알려진 도시입니다.
소렌토라는 소도시에 우체국을 지어달라고 이곳을 방문한 관료에게
떠날 때 두시간만에 만든 곡이라고 합니다.
가사내용으로는 연인에게 다시 소렌토로 돌아오라는 애청하는 곡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실제는 그런 숨은 얘기가 있었습니다.
소렌토 전철에서 내려 카프리섬으로 가는 여객선을 탓습니다.
40분정도 항해하여 카프리섬으로 가서 그곳에서 이태리식의 점심을
먹고 다시 차로 정상으로 향했습니다.
절벽을 타고 올라가는 미니버스... 꼭 백두산 올라가는 짚차와 비슷합니다.
운전기사의 운전솜씨에 중간중간 박수소리가 나왔습니다.
정류장에 내리자 다시 1인용 리프트를 탑니다.
20분정도 리프트를 타고 올라가며 해안경치를 관람했습니다.
지중해의 맑은 물위에 떠있는 카프리섬... 주변의 소렌토, 나폴리 항구등이
보입니다.
산타루치아만으로 펼쳐진 해안선이 한눈에 보이는 카프리섬 정상...
이곳저곳에서 사진을 찍고 맥주를 마시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살아있음이 바로 기쁨으로 이어지는 순간입니다.
뭔가 새로운 세상을 맛보고 경험한다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맨날 같은 시스템에서 톱니가 돌아가듯이 살아간다면 우리의 삶이 초라합니다.
이렇게 전혀 새로운 세계를 맛보며 산다는 것...바로 삶에서 희열을 느낄수
있는 순간입니다.
이제 베네치아 관광입니다.
이태리여행의 가장 큰 이벤트가 숨겨져있는 곳입니다.
베네치아의 다른 이름은 베니스입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베니스 영화제....
산마루치아 광장, 수많은 운하로 이뤄진 도시, 물의 도시라 불리는 곳입니다.
이곳에 도착하자 현지 가이드가 우리를 반겨주었습니다.
이태리의 현지 가이드는 거의 음악을 하려고 유학을 왔던 사람들로 한국의
유럽여행객이 많아지면서 가이드로 직업을 전환한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베니스의 가이드 역시 성악공부를 하기위해 이곳에 왔다가 정착한 사람입니다.
성격이 활달하여 우리에게 많은 감동을 안겨주었습니다.
베니스에 오면 옵션을 꼭해라... 우리에게 가장 귀중한 보물은 바로 지금이다.
금중에서 가장 귀한 금은 지금...바로 지금이다.
그 가이드의 말이 지금도 귀에 쨍쨍하고 가장 인상 깊게 다가옵니다.
베니스라는 도시는 옛날 로마가 멸망하여 훈족에게 쫒길때 살기위해 갯펄에
백향목을 박고 만든 역사도시입니다.
170개의 운하와 400개의 다리가 115개의 섬을 연결하여 하나의 도시를 이룬
운하도시입니다.
자동차는 한 대도 없고 오직 배가 운송수단입니다.
한때는 10만이 넘게 거주를 했는데 요즘 환경변화로 인해 바닷물이 넘쳐나
1층건물에 바닷물이 유입되는 사례가 많아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떠나 지금은
5만정도가 살고 있다고 합니다.
곤도라를 타고 도시를 구경했습니다.
조그만 조각배에 6명씩 타고 갔는데 우리 친구들 부부들만 한배가 되어 움직여
분위기가 그만이었습니다.
샴페인 한잔씩 하면서 옆배에서 울려퍼지는 기타와 노래소리, 가이드가 특별히
마련해준 이벤트였습니다.
음악과 함께 조각배에 몸을 싣고 베니스의 좁은 운하길을 계속 노를 저어갑니다.
흔들리는 배에 한잔씩 먹은 삼페인에 옆에서 노래소리는 들려오는 순간
기분은 하늘을 날라갈듯 업되어 행복해집니다.
정말 여행의 참맛을 보는 순간입니다.
맛있는 음식이 입안에서 맴도는 그런 기분이랄까?
너무 맛있어 삼키기가 아까워 지는 그런 기분을 만끽하며 베니의 곤도라 여행을
마쳤습니다.
유럽여행 최고의 이벤트는 바로 이런 곤도라를 타고 베니스의 좁은 운하길을
기타선율에 맞춰 노래를 듣는 순간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제 르네상스의 발상지 이태리 피렌체로 이동합니다.
꽃의 성모 마리아 성당이란 약칭으로 유명한 피렌체 두오모성당, 베키오다리,
단데교회를 관광하고 시뇨리아 광장을 관광하였습니다.
마침 5월1일 노동절 기념 거리행진을 하고 있었습니다.
전통악기와 전통복장에 깃발을 들고 행진하는 긴행열을 관광할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많은 관광객들 틈에서 사진을 찍고 동영상도 찰영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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