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가족이야기

어머니, 우리 어머니(4)

막내여동생 책내기에 들어갈 네번째 이야기입니다.
-------------------------------------------------------------
우리어머닌 12남매를 낳은 외가집의 장녀로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옛날에는 의술이 발전을 못하고 병원을 못다녀 많은 자녀들을 어릴적 잃으셔 지금 살아계신 외가이모는 6명, 외삼촌 한명입니다.
어머님 위로 이모나 외삼촌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외가에서 장녀로 태어나 동생들에게는 하늘같은 존재이었음에 틀림이 없는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도 이모들이 어머님의 안부를 전화로 물어보고 일년에 한두번 꼭 찾아오십니다.
특히 막내이모는 한달에 한번 이모부와 꼭 와서 뵙고 가십니다.
장녀이다보니 외할머니와 함께 출산을 하셔 넷째이모부터는 우리 형제들과 나이가 비슷합니다.
우리가 어릴적 외가에 많이 놀러간 이유도 외가에 우리 또래의 이모와 외삼촌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릴적 여름방학이면 외가에 놀러가곤 해서 몇일씩 지내며 놀았던 기억이 새록새록 나곤 합니다.
서산시 음암면 도당리는 어찌보면 고향같은 곳입니다.
우리가 살던 해미면 언암리에서 걸어서 8킬로정도의 거리이었던 것 같은데 초등학생이던 우리 형제들은 그 먼길을 알아서 방학때 찾아가곤 했습니다.
둘째형과 내밑의 남동생, 셋이서 초등학생때 외가에 갈때가 생각납니다.
여름이라 한참을 가다보니 땀도나고 목이 마른데 뭔가 요기를 해야할 것 같았습니다.
가다가 참외밭을 발견하고 참외를 따먹기로 하고 형제 세명이 망을 보며 하나씩 따서 먹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가슴을 조마조마 했던 그때의 기억이 막내 남동생에게도 깊게 박혀있는지 지금도 만나면 이야기 하곤 합니다.
아마도 외가에 가면 외할버지와 외할머니가 큰딸의 자식이니 너무 귀여워해주시고 사랑스러워 해줬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도착하면 보리쌀을 한보따리 짐어지고 복숭아 과수원으로 달려가던 외할머니와 이모들, 그때의 복숭아 맛을 지금도 기억이나 복숭아 과일을 좋아합니다.
한번은 막걸리를 좋아하시는 외할버지가 술은 어른에게 배워야한다시며 초등학생은 저에게 줘서 먹었다가 정신이 혼미해져 누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때 고통이 너무 심해서 제가 술을 싫어하게 된 동기인지도 모릅니다.
외할아버지는 일년에 몇번씩 우리집에 와서 자고 가시곤 했는데 오실때면 이것 저것 과자등을 사와서 외할아버지를 이제 언제 오시나 기다렸던 것도 생각납니다.
큰형님과 작은형님은 어느날 동네에서 애들과 놀다가 외할버지가 오시는 것을 발견하고 달려갔는데 외할버지는 만나자마자 절을 하라고 하셨답니다.
그래서 길바닥에서 절을 한 기억이 난다며 웃곤합니다.
외가집의 추억은 또 있습니다.
외가에 가면 항상 간대산을 넘어 두 이모네로 향했습니다.
둘째 이모네와 셋째이모네 집으로 가서 하룻밤씩 자고 오곤 했습니다.
어릴때 이종사촌 동생들하고 노는 재미에 빠져 이모네에도 떠날줄 몰랐습니다.
외가집에 가는 것도 초등학생 시절이 끝나자 시들해졌습니다.
그리고 군대에서 휴가나와 외가집에 갔을때 생각납니다.
휴가나와 외할머니 외할버지를 보기위해 외가에 가서 인사하고 식사하고 바로 나오려 했더니 외할버지의 호령에 놀란 적이 있습니다.
그때 외할버지도 이제 노령으로 거동이 불편하고 당신이 얼마 못산다는 것을 아시는지 그렇게 얼굴만 보고 가는 놈이 어디있느냐며 자고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아마도 자지는 않고 그냥 조금 더 머무르다 외가를 떠났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외할머니는 나중에 담배를 피우셨습니다.
담배를 배우게 된 동기가 외할아버지라고 하십니다.
농담을 좋아하시고 항상 곁에서 보면 외할머니에게 장난을 걸고 하시던 모습이 생각납니다.
외할버지가 담배를 피우시니 아내도 같이 피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하신 모양입니다.
그래서 한대 두대 피우다보니 늙으셔서는 완전 꼴초 할머니가 되셔 성인이 되어 외가에 들릴때면 담배를 사가지고 가곤 했습니다.

저 같은경우, 아내의 처가가 바로 옆집이 되어버려 지금도 외가동네에 갑니다.
바로 외할머니가 지금의 아내를 만나게 한 중매쟁이 입니다.
외할머니와 장모님은 이웃사촌으로 왔다갔다 놀러다니다가 서른살이 되도록 장가안간 손자가 있다고 하여 장모님과 이야기를 해서 딸을 만나게 한 것입니다.
외가와 처가가 있는 동네, 저의 고향과 같은 동네, 음암면 도당리 간대산 아랫마을입니다.
지금은 외갓집도 이사를 가서 다른사람에게 팔려 없어지고 외갓집자리는 비닐하우스가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그저 흔적만 있을 뿐이지만 가끔 처가에 가면 둘러보곤 합니다.
처가에 가면 또 이모님댁에도 들려 노령의 이모와 이모부도 뵙고 오는데 그 옛날 정은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셋째이모네는 바로 외삼촌이 사시고 있어 같이 들려보는데 아직까지 농촌에서 농사를 열심히 짓고 계십니다.
셋째이모님댁과는 특별한 추억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 아버님처럼 교육열이 투철하신 이모부와 이모는 자식들을 어려운 환경에 대학까지 가르친 위대한 분들입니다.
그중에 큰아들은 명문대를 나와 안기부에 근무하다가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지금까지 미국 아트랜타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모와 이모부는 미국에 사는 자식에게 가서 몇달씩 있다가 오시곤 하셨는데 저희부모님도 같이 동행해서 3개월있다가 오신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부모님이 건강하셔 미국에 3개월 머무시면서 특별한 추억을 만들고 돌아오셨습니다.
미국에 사는집에 수영장과 테니스장이 있어 평일에는 수영과 테니스를 이모네 부부와 지내고 주말이면 이종사촌 동생네와 미국여행을 하곤 하셨습니다.
그때 나이아가라 폭포도 가보고 미국의 이곳저곳 여행을 하셨습니다.
그때 돌아오셔서 아버님의 하신 말씀이 기억납니다.
흑인의 이미지가 미국가기전까지는 범죄자 나쁜사람들로 인식했는데 미국에 가보니 흑인들이 너무 사람들이 좋다는 것입니다.
친절하고 인사잘하고 성격도 온순하더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실제로 경험을 해봐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미국에 이민간 그 이종사촌은 몇십년동안 한국에 한번도 나오지 않고 지금까지 그곳에서 살고 있습니다.
내 막내 남동생만 미국에 출장을 갔을때 그집에 가서 자고와서 대접을 잘 받았다고 합니다.
그 이종사촌 동생은 지금도 가끔 어머님께 미국에서 용돈을 부처주는 마음착한 조카입니다.
큰이모를 아주 특별하게 생각하는 이종사촌의 마음 씀씀이에 놀랄 뿐입니다.
지금이라도 우리도 셋째이모부부에게 잘해야 할텐데 하는 마음뿐이지 아무것도 못하는 제가 부끄럽습니다.
이제 거동도 거의 못하시는 어머님의 상태를 동생도 아는지 전에는 가끔 전화도 하더니 이제 귀가 안들리니 대화가 안되 전화도 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가족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머니, 우리어머니(5)  (0) 2021.04.21
어머니, 우리어머니(5)  (0) 2021.04.19
어머니, 우리 어머니(3)  (0) 2021.04.16
어머니 우리 어머니(2)  (0) 2021.04.15
어머니, 우리 어머니(1)  (0) 2021.0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