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포루투칼, 모르코 여행을 떠납니다.
유럽쪽은 몇년전에 터키를 다녀왔고 작년에 서유럽6개국을 여행했었습니다.
아내는 동유럽5개국을 몇개월전에 갔다왔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저와 함께 스페인 포루투칼 모르코 여행을 참좋은 여행사편으로 다녀올 예정입니다.
9박12일편으로 비행기에서 갈때와 올때 자는 여행입니다.
스페인 하면 떠오르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우선 투우, 풀라멩고, 카르멘의 정열의 나라가 떠오릅니다.
미술의 피카소가 있고 건축의 가우디가 세계적으로 유명합니다.
특히 가우디가 평생을 특이한 건축물로 그가 만든 것은 예술 자체로 사람들의 감탄을 절로 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이번에 가서 그의 건축물을 감상하는것이 저에게는 가장 흥미진진합니다.
비행기에서 스페인에 관한 역사와 지리가 나온 책을 가지고 가서 읽으며 갈 예정입니다.
유럽에서는 세번째로 큰나라, 아프리카를 잇는 이베리아반도에 위치하고 있어 이슬람 문화를 같이하고 있습니다.
스페인의 역사를 간략하게 스크랩 해보았습니다.
스페인의 역사를 개괄적으로 정리한다.
<고대>
유럽과 아프리카의 교차점에 위치한 이베리아 반도는 오랫동안 여러 민족과 문명의 침략 대상이었다.
BC 8000-3000년 북아프리카에서 건너온 이베리아인이 처음 이곳에 정착했고 BC 1000년경에는 켈트족이 북스페인으로 들어왔으며,
지중해 해안을 따라서는 니키아 상인들이 해상 무역의 거점을 건설했다. 그 후 BC 600-500년 경에는 그리스인과 카르타고인이 차례로 건너왔다.
로마인들은 BC 3세기에 이미 이베리아 반도로 진출했다.
기독교는 BC 1세기에 전래됐으나 처음에는 박해와 순교가 계속됐다. AD 409년 로마의 지배를 받던 스페인은 게르만족의 침략을 당했고,
419년에는 역시 게르만 계통인 서고트족이 왕국을 건설했다.
711년에는 무어인(711년부터 이베리아 반도를 정복한 아랍계 이슬람교도를 지칭하는 것으로 인종학적 개념은 아니다)이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마지막 서고트 왕, 로데릭을 패배시켰다.
<이슬람 왕국과 국토회복 운동>
714년 회교 군대는 북부 산악지대를 제외한 이베리아 반도 전체를 점령했다.
이후 이슬람교도들은 스페인 곳곳을 무려 800년 동안 지배했다. 이 시기에 예술과 과학이 번창하여 새로운 농작물과 농경기술이
소개되고 궁전, 모스크(이슬람 사원), 학교, 공중목욕탕 및 정원이 건설됐다.
1085년 레온과 카스티야 왕조의 알폰소 6세는 톨레도를 수복했는데, 이는 기독교인들이 이슬람을 상대로 벌인 국토 회복 운동의 첫 승리였다.
13세기 중반에는 기독교도가 그라나다 지방을 제외한 반도의 대부분을 다시 차지했다.
이 과정에서 카스티야와 아라곤 왕국이 기독교 스페인의 주 세력으로 등장하였고, 가톨릭 군주로 알려진 이들은 스페인을 통일하여
스페인 황금시대의 기초를 다지는 한편 수천 명의 유태인과 비기독교인을 추방하고 처형했다. 1492년 그라나다의 마지막 이슬람교 지도자가
그들에게 항복하면서 국토 회복 운동은 막을 내렸다.
<황금기>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우연히 바하마에 도착하여, 아메리카 대륙을 스페인 영토로 선포했다.
이후 스페인은 아메리카 대륙의 고대 왕국을 멸망시키며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3세기 동안 신세계에서 유입된 막대한 금은 덕분에
스페인은 급속도로 팽창했다.
그러나 18세기에 이르러 연이은 전쟁과 실정으로 막강했던 스페인 제국은 카를로스 2세를 마지막으로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카를로스 2세는 후계자 없이 눈을 감았다. 이로 인해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10여년간의 전쟁(1702-1713년)이 벌어졌고 결국 프랑스
루이 14세의 손자 펠리페 5세가 스페인 부르봉 왕조의 첫 왕이 되었다.
이 시기에는 안정 및 계몽 정신에 입각한 개혁과 경제적 성장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18세기 말 프랑스에 전쟁을 선포하고 뒤이어 영국과 포르투칼과 맞서면서 스페인은 일부 식민지를 잃고 트라팔가 해전(1805년)으로 해군도 무너졌다.
<근대>
1807-08년 나폴레옹은 스페인 왕 카를로스 4세를 쫒아내고 친형인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왕위에 앉혔다.
스페인은 이에 대한 반발로 5년에 걸쳐 독립전쟁을 일으켰다.
1815년 나폴레옹이 패하자, 부르봉가의 페르난도 7세가 다시 스페인의 왕위에 올랐다.
페르난도 7세의 전제군주적 통치 하에 다시 종교재판이 시작되어 인문주의자와 헌법학자들이 처형됐고, 언론의 자유가 억압됐다.
경제는 쇠퇴하고 아메리카 대륙의 식민지들은 차례로 독립했다.
1833년 페르난도 7세 사후에는 돈 카를로스를 지지하는 보수세력과 페르난도의 딸 이사벨(후의 이사벨 2세)을 지지하는
자유주의자들의 권력 다툼으로 제1차 카를로스 전쟁이 시작됐다.
1868년 이사벨 2세가 쫓겨나고 1873년 제1공화정이 선포됐으나, 18개월 만에 왕정이 복고 되면선 이사벨 2세의 아들 알폰소 7세가 왕위에 올랐다.
이러한 정치적 혼란에도 불구하고 19세기 후반부터는 산업화에 힘입어 경제가 번창하기 시작했다.
1898년에 스페인은 미국에 패하면서 쿠바, 푸에르토리코, 괌, 필리핀 등의 식민지를 잃었다.
<내전과 독재정권>
20세기 초에 모로코의 군사 위기와 급진 세력의 등장으로 불안 요소가 증가했다.
1923년 내전이 시작될 무렵 미겔 프리모 데 리베라가 등장하여 1930년대까지 군사독재를 실시했다.
1931년 알폰소 8세가 스페인에서 쫓겨났고 제2공화정이 선포되었다.
제1공화정과 마찬가지로 제2공화정도 내분에 시달렸다.
1936년 선거 결과 스페인은 민중전선 세력(좌익세력의 불안한 연합)과 우익의 민족주의 세력(군,교회,파시스트 성향의 팔랑헤당의 연합)으로 분리됐다.
군부가 반란을 일으키면서 발발한 내전(1936-39년) 동안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은 독일 나치와 이탈리아 파시스트의 막대한 군사적 원조를 받았고,
반면 선거로 선출된 공화 정부는 러시아와 기타 외국 세력으로부터 소규모의 원조를 받았다.
1939년 프랑코 측이 승리를 거두었고 대략 35만명의 스페인 국민이 희생되었다. 전쟁 후에도 수천 명의 공화주의자들이 처형, 감금되거나 망명길에 올랐다.
프랑코가 36년 독재를 시작했을 때 스페인은 이미 국제사회에서 고립되고 경제 불황으로 허덕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1950년대와 60년대에 들어와서야 관광산업이 활성화되고 미국과의 조약으로 자금이 돌기 시작하면서 경제가 회복되기 시작했다.
1970년대는 유럽에서 가장 빠른 성장세를 보였다.
<현대>
프랑코는 1975년 사망하면서 알폰소 8세의 손자 후안 카를로스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후안 카를로스 국왕은 스페인이 독재에서 벗어나 민주주의로 옮겨가는 데 큰 몫을 했다.
1977년 최초의 선거가 행해졌고, 1978년 새 헌법이 제정되었다. 1986년 유럽연합에 가입했고,
1992년에는 세비아 엑스포와 바르셀로나 올림픽을 유치하면서 세계무대에 성공적으로 복귀했다.
현대적이고 진취적인 오늘날의 스페인은 오랜 세월 드리웠졌던 프랑코의 독재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1996년 중도우파의 국민당 Partido Popular(PP)이 새롭게 정권을 잡아 경제의 분산화와 자유화 정책을 수립하면서 경제발전의 길을 열었다.
그러나 국민당은 이라크전 파병을 결정하고, 2004년 3월 마드리드 열차 폭발 사건을 바스크분리주의자들의 소행으로 몰면서 인기가 땅에 떨어졌다.
마드리드에서 테러리스트의 공격이 있었던 3월 11일이 며칠 지난 후에 있었던 2003년 선거에서 국민당(PP)이 사회노동당(PSOE)에게 대통령 선거에서 패했다.
새로이 선출된 대통령인 호세 루이스 로드리게스 사타테로 Jose Luis Rodriquez Zaptero 는 곧 큰 변혁을 일으켰다. 대통령으로서의 첫 정책으로서 스페인 군대를 이라크에서 철수시켰고, 각료 인원을 여성 8명, 남성 8명의 장관으로 양성 균등 원칙을 자리잡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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