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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네팔여행

인도 여행하면서 쓴 여행기

인도여행을 왔다.

델리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느낀것...

아~매연냄새,꾀꾀한 냄새가 코안으로 들어온다.

매연세상의 델리시내는 처음부터 인상을 찌푸리게 했다.

이정도로 심각한 델리의 환경문제가 바로 머릿속에 스쳐지나간다.

그리고 시내로 들어가면서 바로 복잡하고 무질서한 자동차,오토바이,자전거 사람들이 눈에 들어온다.

중국과 거의 맞먹는 인구, 다양한 인종이 뒤섞인 이땅에 그래도 사람들은 한국보다 행복지수가 높게 해서 살아간댄다.

힌두교와 이스람교가 어울어져 잘 살아간다.

힌두교가 80퍼센트를 차지하지만 이곳에는 모스크가 있는 이스람교가 존재하고 거리에는 차도루를 쓴 여성들도 흔히 볼수있다.

인도여행은 처음 비행기 내릴때부터 고통이 시작되었다.

야간비행기를 타고 왔다.

8시간 가까이 걸리는 비행시간, 그리고 새벽에 도착해서 도착비자를 받으려 줄을 섰다.

이것도 심사하는데 한사람앞에 오분여 시간이 걸리다보니 우리한국사람들 50여명이 비자를 받는데 2-3시간을 심사대에서 기다려야했다.

인도사람들은 시간관념이 없댄다.

그저 대충 살아가는 그런 생활환경이다보니 급한게 없고 욕심이 없는 모양이다.

델리호텔에 새벽5시에 들어가 6시에 식사를 하고 7시에 버스를 타고 자이푸르로 떠났다.

우리일행은 17명으로 인도여행을 시작으로 6일동안 이곳에 있다가 7일차부터 네팔로 향해 네팔관광을 하게 되어있다.

버스부터 한국의 관광차와는 차원이 다르다.

운전석과 객석이 완전히 분리되어 일단 차가 떠나면 운전석의 문이 닫혀 이곳사람들의 대화나 마이크 말이 운전석에 전달되지 않는다.

그것만은 한국보다 좋은 것 같다.

운전사도 한명이 아니라 조수가 따라붙어 있다.

타는곳이 높다보니 보조 계단을 내릴때는 앞에 갖다놓는데 이는 조수가 그 역할을 한다.

이곳의 관광차는 대부분 그렇게 되어있는걸 발견할수있었다.

델리에서 자이푸르 관광을 하기위해 델리시낼 빠져나가면서 시내구경을 했다.

정말 지저분한 거리, 무질서의 그 자체였지만 이들은 하나도 그런게 불편한 기색이 없다.

수많은 오토바이들, 낡은 시내버스,차들도 몇십년은 돈듯한 차들이 온거리를 덮었다.

우리말로 톡톡히라는 택시도 많이 있다.

오토바이를 개조한 택시로 창문도 엉성하고 자리도 대충만들었다.

이곳에서는 이게 대중교통수단이란다.

노점에서 파는 가게들,지저분하고 비위생적이다.

한국에서는 전혀 이해가 되지않는 일이 이곳에서 일상적으로 정상으로 벌어진다.

다양한 복장들, 머리에 천을 두른사람,형형색색으로 휘감은 여인, 남자들의 복장도 너무 다양해서 바로 그게 인도의 모습이다.

인도 관광이란게 바로 이런걸 보는게 관광같다.

무질서가 바로 이들의 문화이고 지저분한게 이들의 문화,그리고 아무런 불편없이 행복하게 살아간다.

한국보다 행복지수가 높고 이혼율도 거의 없다.

애들은 한두명 낳는게 아니라 아직도 이들은 자식들이 5-6명은 되야 정상가족이다.

한국보다 몇십년 낙후된 문화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전혀 한국이 부럽지않게 느끼며 산다.

이제 이틀밤을 인도호텔에서 잤다.


인터넷의 와이파이가 역시 느려터지다.

한국을 제외하고는 어느나라든지 인터넷이 잘 안된다.

다행히 가이드가 와이파이를 여러사람이 사용할수 있는 기기를 가지고 있어 버스속에서 인터넷이 되지만 느려터지기는 마찬가지다.

가이드는 85년생으로 한국에 일년반정도 유학한 인도 현지인 젊은사람이다.

동국대학교 한국어 학당출신인데 그렇게 한국어가 유창할 수가 없다.

한국의 통상적인 속담까지 들이대며 설명을 한다.

그는 형제들이 11남매라고 한다.

내 자식뻘 되는 친구지만 한국에서 여러사람들이 한국생활을 도와줘 한국어를 잘하게 되었고 한국사람들에게 친근감을 가지고 있는 친구다.

한국사람들에게 많은 은혜를 입어 한국사람들게 자신이 은혜를 갚고 싶다는 표현을 하는데 진실 같았다.

인도 문화에 대해서도 한국과 비교하며 잘 설명하는게 한국가이드보다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큰 돈 욕심도 내지않아 쇼핑센터에 가야하지만 피곤할까봐 가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하였다.

무언가 베프는 삶의 인도인의 생각을 느낄수 있었다.

거리에서 실제로 소들이 돌아다닌다.

이곳사람들은 소를 신성시한다.


길거리 돌아다니는 소는 거의 주인이 없댄다.

자신이 뭔가 죄를 지었다 생각되면 소를 사서 제를 올리고 거리에 자기멋대로 살아가게 내버려둔댄다.

사람들이 먹이를 주고 소는 자기가 가고 싶은대로 가면서 살아간다.

소고기를 먹지않는 이들은 소들이 자기들이 환생해서 살아갈 미래의 모습으로 여기는 것 같다.

자이푸르 중심가에 있는 하와마할에 갔다.

이곳은 시내 도로가에 있는 왕실 건물로 왕실의 여인들이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시장과 바깥풍경을 줄길수있게 만든 건물이다.

분홍빛갈의 아름다운 색깔로 된 이 거물으니 950개가 넘는 창문이 있으며 출입문은 건물 쪽에 위치한다. 격자형의 창문들은 무더운 라자스탄 열기 속에서 바람을 끌어와 시원하게 만들어 바람의 궁전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왕실의 사람들이 바깥구경을 하기위해 만든 건물을 보니 역시 평범한 삶이 진정한 삶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시장속에서 서로 치열하게 싸우고 도와주는 그런 삶이 진정으로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아닐까 생각되는 것이다.

이주위를 보면 그시대에 상가건물을 보면 일정한 크기로 나눠진 것을 볼 수 있고 번호가 붙여져 있다.

1799년에 건축된 바람의 궁전 하와마할은 자이푸루의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근교에는 최근 지하철공사로 복잡하다.

 공사가 없더라도 복잡한 거리인데 지하철공사까지 겹치니 복잡하기 그지없다.

 도로가 정비되어 있지않아 울퉁불퉁 엉망진창인 거리에는 장사꾼 시내는 그야말로 난장판이다.

  우리가 생각할때는 금방 교통사고라도 날 것 같지만 나름대로 이리저리 잘도 피해가며 사고가 없다.

하와마할의 근처에는 상가들이 많다. 하와마할의 창문은 밖에서는 안이 보이지 않게 특별히 설계되었다고 한다.


 바람의 궁전이란 이름은 밖에서 부는 바람이 건물 전체를 시원하게 만드는 특별한 구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이곳을 떠나 잔타르만타르 천문대에 가보았다.

당시의 전제군주로서는 보기 드물게도 건축 천문학,의학 등 다양한 학문에 관심이 많았던 자이싱 2세가 건설한 천문대,

자이루르 외에도 델리, 웃자인, 바라나시, 마투라에도 건설했는데 자이푸르 잔타르만타르는 인도내에 있는 중세식 천문대 중에서 가장

큰 규모이며 실제로 20세기초까지 실제관측을 했을 정도로 높은 정확도를 지녔다.

해시계를 보았는데 실제로 현재시간에서 플러스 11분을 더하면 현재시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경주에 첨성대가 생각났지만 이쪽의 건축물의 정확도에 놀랄따름이었다.

날씨는 무척 덥게 느껴졌다. 한국의 초가을 날씨로 차속에 들어오면 에어콘이 없이는 살수없는 정도의 더운날씨다.

시내를 걷다보면 가끔 소도 만난다.


인도에서 소는 신성시되는 동물로 시내거리를 사람처럼 활보하며 다닌다.

사람과 소가 동일시 취급되는 도시가 인도의 거리풍경이다.

암소는 젓을 짜기 때문에 주인이 있다고 한다. 거리를 돌아다니는 소는 대부분 수소들로 몰려다니기도 하고 혼자 다니는 소도 있었다.

거리에 똥을 싸기도 해서 잘 보고 걸어야한다.

소가 죽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물어보았더니 가죽을 벗겨 밭에다 놓으면 개나 동물들이 먹어없어진다고 한다.

인도의 식당에 가면 소고기와 돼지고기가 보이지않는다. 고기라고는 닭고기뿐이다.

카레맛이 우리것보다 못한것을 느끼는데 이는 소고기가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일거로 추측된다. 식사때마다 나오는 카레가 싱겁게 느껴지면서 너무 담백해서 맛이 없다.

인도카레가 변형되어 나온 한국의 카레와 일본의 카레, 이곳 본토보다 맛이 좋다.

시키리로 이동을 하였다.

버스를 타고 가는데 도로가 깨끗하지도 않고 우리나라 지방도시의 도로만큼도 잘 정돈되지않아 불편하기 짝이없다.


 도로에는 대형트럭들이 대부분이고 버스는 몇십년 탄 것처럼 매연을 뿜으며 달린다.

한마디로 60-70년대의 한국의 도로와 자동차를 연상시킨다.

그래도 이들은 아무불편없이 잘 다니고 사고도 거의 없이 무질서에서 안정을 찾으며 살아가는 것 같다.

아그라에 도착해서 파테푸르 시크리성에 가보았는데 이곳은 한적한 시골같은 구석에 자리잡은 성이다.

악바르 황제시절 무굴 문화의 꽃을 피웠던 본거지란다.


파테부르 시크리는 한때 악바르 황제의 수도였지만 14년이 지난후 다시 아그라도 수도를 옮기게 되어 페허로 남게 되었습니다.

모든 문화와 종교를 포용했던 악바르 황제가 머물렀던 곳답게 곳곳 힌두 건축의 흔적도 볼수있었다.

대부분의 건축물들이 붉은색의 사암으로 만들어져있다. 바위에는 이스람교,힌두교,불교을 상징하는 조각품들이 새겨져 있는걸 볼수있다.

무굴제국이란 나라가 이렇게 전 종교를 포용하며 왕궁을 세웠다.

1526년부터 1857까지 인도,파키스탄,아프가니스탄을 점령한 이슬람 왕조다.

수도는 라호르,델리,아그라,카불에 이르렀다.

무굴제국은 티무르 왕조에 속한 바부르로부터 시작되었다.바부르는 원래 인도보다 사마르칸트지역을 차지함으로써 티무르의 옛 영광을 되찾고 싶었다.

당시 쇠락한 텔리의 로디왕조를 멸망시키고 무굴제국을 세웠다.

gnakds의 뒤를 이은 아크바르는 북인도 전역을 차지한뒤 남부 데칸지역을 차지하는 국구를 이루었다.

악바르는 영토확장뿐만 아니라 정치,경제, 사회의 전 분야에서도 물굴제국의 확고한 토대를 마련하고 종교적으로도 이스람교 외외의 종교를 포용하고 인두세를 페지하며 융화정책을 펼쳤다. 백성들을 위주로 위정을 펼쳤던 것이다.


종교적 융화책은 자항기르와 샤 자한까지 이어지지만 6대 아우랑제브가 다시 인두세를 부활시키는등 종교적 억압책을 실시하면서

제국의 분열이 심화되기 시작하고 포르투갈을 비롯 유럽열강들이 인도침입이 시작되었고 네덜란드를 거쳐 영국이 인도를 차지함으로써 1857년 무굴제국이 멸망했다.

무굴국이 형성된 문화는 인도역사에서 황금기로 건축,문화 음악등에 힌두문화와 터키-페르시아계문화 융합으로오늘날까지 인도문화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있다.

이글 왕국들이 만든 왕궁과 성주변의 건축물들은 화려한 조각과 함께 튼튼하게 만들어져있다.

이렇게 바위로 건축물을 만들어 튼튼하게 보존되다보니 몇백년이 흘러도 변함없이 그대로 있다.


  사람들은 그런 건축물을 보기위에 몰려들어 현재사람들에게 혜택을 준다.

밖의 사람들은 무질서하고 어지럽게 되어있지만 이런 유적지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아이러니가 이나라에는 존재한다.

아그라 성도 마찬가지의 유적지다.

1565년 악바르 대제에 의해 건설된 아그라 성은 무굴제국의 권력을 상징하는 곳으로 엄청난 크기를 자랑했다. 아마르싱문을 통해 궁전 내부에 입장하면 사암으로 만들어진 궁전이 있고 정원수와 초록잔디가 인상적이다.


특히 디완이카스는 귀빈 접견실로 아그라를 흐른 야무나강의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여 경관이 좋은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강쪽에서 타지마할이 보이는데 강쪽에 떠있는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무굴제국의 샤 자한 왕이 사랑하는 왕비 몸타즈를 위해 세운 타지마할...

타지마할은 인도를 상징하는 가장 대표적인 유적지 중 하나이자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대리석 건물이라고 한다

물국 제국의 5대황제였던 사 자한 황제가 아내였던 몸타즈 마할에 대한 변치않은 마음 간직하고자 역사상 유례없는 화려한 무덤을 건설해 그녀에게 바치계다는 계획이 무려 22년동안 타지마할을 짓게했다. 요즘돈으로 720억원의 비용과 연간 20만명의 인원 그리고 1000마리의 코끼리가 동원되어 1653년에 완성되었다.

한여자를 위해 그 많은 돈과 인원 코끼리까지 동원이 되었다니 놀랍기 그지없지만 그 업적으로 지금의 인도관광객을 모으고 있으니 아이러니하기도 하다.

모든 건축물은 돌로 되어있고 돌에는 미세한 조각작품들이 새겨져 있다.

역대 왕조들을 보면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비롯해서 죽음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한 것 같다.

무덤을 화려하고 웅장하게 꾸며야 사후세계에서 행복할 것이라는 믿음이 강해서 이런 유적들이 나온 모양이다.

그런 것을 보면 한국의 대왕들은 겸손한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인도여행에서 가장 느끼는 점은 이런 좋은 문화유산에 비해 서민들의 삶은 가난하기그지없다. 차는 큰차가 거의 없다.


 우리나라 제네시스정도의 차는 눈을 씻고도 찾을수없다.

경차들만 도로를 가득메우고 톡톡히택시, 오도바이 자전거 사람들로 붐비다보니 큰차는 능력이 있어도 불편해서 가지고 다닐수없는 구조로 되어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거리에 나와 걷는데도 불편할정도로 사람들이 많다.

이곳은 아직도 젊은 사람들이 결혼하면 6명 이상의 자녀를 낳는다고 하니 사고방식은 아직도 우리나라 6-70년대의 생각을 갖고있다.

넘쳐나는 인력들이 대부분 건축일 청소일 호텔가방나르는일, 저임금 일자리에서 근무하고 있는걸 보면 인건비가 아주 싼 국가임을 알수있다.

이런 싼 인건비에서도 행복지수가 높다는 것은 마음의 수양이 인간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알수있다.

지금 아그라에서 기차타고 카주라호로 가고있다.

침대칸인데 낡고 허름한 그런 침대칸이다.

현지인들이 대부분 타고있고 인도 현지인 가이드가 동행하고 있어 안심이다.

이곳에서 8시간을 기차타고 갈 것이다. 8시간이면 긴 시간이라 점심은 호텔에서 도시락을 싸와서 이미 먹었치웠다.

오전11시 기차인데 40분은 연착해서 출발한 것 같다.

저녁 캄캄한 밤에 도착할 것이다.

타자마자 2층 침대에서 잠을 조금 자다가 일어나 컴을 켜고 이글을 쓰고있는 중이다.


기차역도 너무 오래되어 깨끗하지 않고 더럽고 지저분하다. 낮인데도 쥐가 돌아다니는 것을 보고 천정에는 원숭이가 왔다갔다했다.

어린아이를 안고 구걸하는 여인은 푸렛홈까지 쫒아와 돈을 달라고 했다. 인도동전있는 것을 다 주어버렸다.

14억이 다되는 인구 중국다음으로 인구가 많은 인도는 너무나 다른 문화를 가지고 있다.

정말 흥미로운 국가이고 인구가 많다보니 잠재력도 대단한 나라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너무 근대화가 안되어 곳곳이 낙후되어 있어 캄보디아 국가 같은 느낌이 있다.

복지분야에 너무 투자를 안하는 것 같다.

집들이 허름하기 짝이없고 금방 무너질 것 같은 집들에서 생활을 하고 있다.

한국의 그 흔한 고층 아파트가 한 채도 안보인다.


자동차도 작은 자동차들이 주를 이루고 그나마 별로없고 오토바이를 개조한 택시들이 온 거리를 누비고 다닌다.

버스는 몇십년은 된듯이 노후된 자동차들이다. 트럭에도 사람이 타고다니고 자전거 할것없이 교통신호없이 거리를 달린다.

어제 저녁에는 맥주나 사려고 가게를 찾아 호텔에서 나왔다가 너무 위험한 느낌이 있어 금방 들어와 버렸다.

대신에 호텔앞에서 현지 가이드를 만나 10불주고 맥주 두 개를 부탁했더니 한병에 3불인데 거스름돈은 없댄다.

캔맥주를 사와서 저녁에 한캔으로 아내와 나눠마시고 잠을 잤다.

기차는 시골 들판을 달리고 또 달린다. 울창한 산림은 없고 들판이 주를 이루고 있는데 놓아먹이는 소들이 보인다.

역시 인도는 소들이 사람과 똑같이 취급받고 사는 유일한 세상이다.

거리에 다니는 소를 보면 생각이 있는 것 같다. 너는 인간 나는 소, 하지만 똑같은 동물이다. 하며 말하는 것 같다.

차를 피하고 사람을 피하고 어떤 사람이 한주먹 밥을 쥐어다주면 냉큼 받아먹는다.

인도의 거리 특징을 보면 특히 트럭이 많다. 그곳도 대형트럭...얼마나 많이 다니는지 거리는 트럭세상, 낡은 버스, 톡톡히택시들이다.

비위생적인 노점식당도 사람이 모이는 곳이면 꼭 있다.


시골동네를 기차가 지나가고 있는데 시골집에 소똥을 모아놓는게 보인다.

아마도 연료로 사용하려 하는 것 같다.

시골동네길로 세발택시들이 즐비하게 다닌다.

daita라는 역에 도착했다.

역전 밖으로는 세발택시들이 줄지어 기다리고 있고 허름한 복장의 사람들이 기차를 타려 프렛홈에 있는게 보인다.

승용차는 이들에게는 아직도 사치품 같다.

낮잠자고 느려터진 와이파이를 하다보니 기차여행 4시간 가까이 되간다.

아직도 4시간은 더 가야 목적지에 갈 것이다.


낮은 나무들이 있는 들판을 기차는 계속 달려가고 있는데 별로 경치가 아름답지 못하다.

주위의 조그만 동네들도 지저분ㄴ 것 같고 허름한 집들뿐이다.

인도는 다양한 종교의 국가로 모두 서로 인정하면서 사는 나라로 치안은 그런대로 안정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돌아다니며 술먹고 싸우거나 술에 취한 모습을 한 사람을 본적이 거의 없다.

동물이나 사람을 똑같이 취급하며 사는 사회이다보니 사람들이 순박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 어느 시골 동네 역을 지나고 있는데 소 한 마리가 선로에서 놀고있다. 누구하나 나가라고 하는 사람이 없다는게 신기하다.

달리는 기차에 소가 뛰어든다면 어떨까 하는 의문을 한다. jhiansi역에 도착했다.

그런대로 큰 중소도시같다.

많은 사람들이 기차를 타려고 기다리고 있고 프렡홈까지 과일 노점상이 있는 걸 볼수있다.

생각 같아서는 나가서 사오고 싶다.

이곳 역시 역을 만든지 몇십년, 아니 영국 식민지 시절에 만든 것 같은 느낌의 역이다.

대리석 바닥에 철골로 만든 천정, 녹슨 철골은 오래된 시설이라는 것 직감할수있다.

한국 같으면 재개발을 해도 벌써 했겠지만 이들은 그런 것에 관심이 없는 것 같다.

곳곳 땅바닥에 앉아 먹고 마신다. 술자리는 없고 음료와 먹거리로 배고픔을 달래는 모양이다.

소와 애들, 철길을 오가며 뭔가 먹을거리를 찾는 것 같다.


해는 늬엇늬엇 기울어지고 있다. 한두시간후면 캄캄해질 것이다.

프라스틱 물병만을 주어 이고 가는 사람들이 보인다. 아마도 이것도 돈이 되는 모양...

선로위를 청소하는 사람이 없는지 별의별 쓰레기가 주위에 나딩굴고 있는 역전의 풍경이 안타깝다.

그많은 인구들, 일이 없어 구걸하는 사람도 많은데 청소라도 시키는 사람에 줄 돈이 없는가보다.

인도여행 5일째...드디어 올 것이 왔다.

설사병이 난 것이다.

어제저녁에 호텔에 들어오자마자 설사를 하기 시작하더니 그다음날 아침까지 계속되었다.

그래서 어제는 거의 하루종일 굶기로 하고 아침,점심을 바나나 2개로 때우고 참아보았다.

어제 굶었더니 역시 조금 효과가 있어 오늘아침부터는 덜하다.

하지만 아직도 안심할 단계는 아니다.

원인을 생각해보니 열차에서 먹은 도시락때문이었다.

나말고도 네명이 설사병이 도져 고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도시락에 카레를 묻힌 감자가 있었는데 먹기 싫은걸 억지로 먹었더니 탈이 나버렸다.


아내는 냄새난다고 다행이 먹지 않아 설사병이 나지 않았다.

속이 좋은 나는 어지간해서 설사가 나지 않는데 정말 오랜만에 인도설사병이 난 것이다.

인도에 오면 음식과 물을 조심하라고 한다.

조금만 시원잖으면 먹어서는 안되는데 내 속을 믿고 감자를 먹은 것이 탈이 났다.

인도여행에서 설사를 하지 않으면 인도여행이 아니라는데 드디어 설사병이 나서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 아침 약간 설사기운은 있지만 심하지 않아 음식을 조심하면 낳을 것 같다.

카주라호에 도착해서 카쥬라호 사원군을 관광했다.

돌에 새겨진 조각품은 정말 예술 그자체였다.


1000년전 최고의 번영을 누렸던 찬델라 왕조에 의해 건설되었으며 카쥬라오ㅢ 사원들은 중세인도의 훌륭한 예술이 보로 평가받고 있다.

 85개 사원중 현재는 22개 사원만 남아있다.

인도를 대표하는 유적지중 가장 에로틱한 사원으로 외벽에 수많은 에로조각은 정도가 심할 정도있다. 그 옛날에 성행위는 지금이나 별다른게 없다는 사실도 알았다.

12시간 버스를 타고 카쥬라호에서 바라나시로 이동을 하였다.

비행기로 오면 한시간도 안되는 거리지만 이곳 도로사정상 버스로 오니 그렇게 시간이 많이 걸렸다.

12시간을 버스속에서 갇혀 오는 것 그 또한 고통의 하나라는 것을 느꼈다.

더구나 속도 좋지않은 컨디션에서 있다보니 인도여행을 금방이라고 끝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