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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로의 예산생활

예산 추억여행을 떠나다(.오성빌라트_.)

이곳에서 아이들의 청소년기를 보냈다.

한참 IMF시기가 기승을 부릴때 나는 구로공단 타자기 공장에서 이곳 자동차부품공장으로 옮겨왔다.

사무기의 주역이었던 타자기가 컴퓨터바람에 빌려 내수와 수출이 사양길을 가면서 타자기 생산을 중단했다.

회사는 타자기공장을 하면서 자동차부품 공장을 안산공단에서 하고 있었는데 마침 예산에 부도난 공장이 있어 이곳을 인수하며 예산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회사에서는 관리부장이던 나에게 이곳 24평 아파트를 관사로 내주고 이사비용도 주었다.

3개월여 주말부부를 마감하고 관사로 식구들을 서울 서초구 우면동에서 예산 시골로 이사를 했다.

예산에서 7년여 살면서 월급쟁이로서는 최고의 시간을 보냈다고 생각한다.

회사까지 6킬로정도 들판을 걸어서 출퇴근하고 내차량은 일요일만 잠깐 사용하는 것으로 주행거리가 7년동안 4만킬로도 되지 않았다.

애들도 공부를 잘해 학비가 거의 들어가지않았고 학원도 다니지 않았다.

어찌보면 애들 교육에 무관심하다고 할지 모르겠다.

아이들이 우리 살림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집을 회사에서 얻어주다보니 마침 서울집 전세와 그동안 모아논 돈으로 주공아파트 상가를 두채 분양을 받아 월세도 꼬박 꼬박 받는 부수입도 생겼다.

우면동에서도 아파트 상가를 하나 가지고 있어 상가에서 나오는 수입이 추가되다보니 급여와 함께 월급쟁이로서는 최고의 나날이었다 할수있고

천안에 원룸건물 짓는데 밑거름이 되었다.

내가 7년여 이곳에서 생활하면서 아파트앞 텃밭에 토끼장을 만들어 토끼를 길렀다.

시골생활을 본격적으로 한 것이다.

흔적도 없어진 내 토끼장...

주변에 농사를 짓는 사람이 있어 이곳에 가깝게 살던 몇몇 사람들 소식을 물어보았다.

당시 70대초반이던 할아버지부부는 몇년전에 돌아가셨다고 한다.

택시운전하며 지내던 나보다 십여살 위 아저씨도 돌아가셨고... 이곳을 떠난지 12년뿐이 안지났는데 세상은 변하고 있었다.

인사를 나누고 싶은 사람은 세상을 떠났다.

 

예산의 추억을 고스란이 안고 있는 이 조그만 빌라에서 애들을 다 키웠다.

그래서 더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