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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로의 서울우면동 생활

여름이면 생각나는 추억

작성년도: 1995년 8월 15일 올렸던 곳: PC통신 하이텔 베스트5 제목: 여름이면 생각나는 어릴때의 추억 best5 어느덧 여름도 다지나가는데 베오란 에 나온 여러 이야기중 추억에 관한이 야기를 몇개 읽다가 저의 어린시절이 떠올라 몇자 적어봅니다. 통신을 하는 대부분의 여러분과는 생활과 생각이 많이 차이 날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면 60년대 이야기들이닌깐요. 제가 국민학교 여름방학을 보낸 그시절 에 기억나는것 몇가지만 소개드릴까 합니다. 하나: 참외서리 참외는 한여름 이맘때쯤이면 한참 익어갈 때입니다. 제가 살던곳은 바닷가와 가까운 곳이라 한참 더위가 시작되면 바다에 가지않 으면 동네앞 포당(조금 큰 샘;우리는 그렇게 불렀다)에 몰려가 멱을 감곤 했는데 점심때가 되어서 그런지 동네아이들 몇명은 배가 고팠습니다. 그래서 생각해낸게 누구네집 참외밭이 산모퉁이에 있다는 정보을 알고 우 리는 벌건 대낮에 모의를 했습니다. 몇명이 뒷쪽산으로 가서 우선 정찰을 해봤습니다. 원두막에는 아무도 없다는 신호와 함게 참외밭에 들어가 냄새를 맡아보고 익은것만 몇개씩 따서 모시저고리위에 담았읍니다. [참고로 맛있는 참외를 고르는 요령은 냄새가 잘나는 것임] 자기가 담을 수있는 만큼 윗저고리에 안고 산속으로 튀어 도망 나왔습니다. 그리고는 산모퉁이에 둘러앉아 바지에 쓱쓱 문질러 엷은 속만 배부르게 파 먹었읍니다. 더이상 못먹을 정도로 먹고 남은것은 산속에 숨겨놓고 다시 땀이 비오듯하자 다시 멱을 감으로 갔습니다. 성공리에 작전을 마친 어린 개구장이들은 개선장군처럼 야호를 외치며 멱 을 감는데 가슴이 철렁하는 사건이 터졌습니다. 참외밭 주인이 나타난 것입니다. "너희들 이리나와" 우리들은 한쪽 가슴에는 꿍꽝 꿍꽝 뛰는 가슴을 안고 벌겋게 상기된 주인 아저씨앞으로 벌거벗은채 섰습니다. 그당시는 수영복도 없었고해서 완전히 발가벗은채 수영하는게 보통 이었읍 니다. "너희들 짓이지. 바른대로 말혀! " "왜그런대유~ 우리는 쭉~ 멱만 감었슈~ 증말이란게유~" 우리들 중에 배짱좋은 짱구녀석이 시치미를 뗏습니다. 바로 그때 옆에있던 순돌이가 " 꺼~억~"하며 트림을 하였습니다. 우리의 눈은 모두 그녀석에게로 갔습니다. 그런데 그녀석은 트림과 함게 참외씨 하나가 툭하면서 입밖으로 튀어나와 버렸습니다. 참외밭 주인 아저씨 발밑으로 떨어진 참외씨가 증거가 되버리는 순간이었죠. "야 녀석들아. 저녀석 참외씨는 어디거여?" 주인 아저씨는 펄쩍 퍽쩍 뛰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할말을 잃고 손이 닿도록 싹싹 빌어지만 집에들어가 아버지에게 회 초리를 맞으며 맞있게 먹던 참외맞을 잊어야 했습니다. 둘: 외가집 가는길(참외서리2) 우리 외가집은 우리집에서 30리 떨어진 곳에 있었습니다. 버스를 타려면 십오리를 걸어나와야 해고 그당시만 해도 버스가 자주없었 어 걸어서 방학만 되면 외가집으로 우리 4 형제들은 달려갔습니다. 큰형님만 따라 졸졸 병아리가 어미 �따라가듯이 4형제는 30리길을 놀며 장난치며 외가에 갔던것 같았습니다. 지금 그길을 생각하면 그어린녀석들이 방학때만되면 먼길을 걸어서 갔었는지 방향은 어떻게 알았는지 길을 잃지않고 간게 참 영리도 하다 느꼈집니다 . 하지만 외가집에 가면 무조건 좋은일만 있을것만 같았고 외할머니 외할아 버지가 그렇게 좋았습니다. 그때도 역시 가다보면 목이마르고 배가 고파 밭에 있는 참외밭으로 눈이 계속 가는 것이었습니다. 길옆에 참외밭이 많았습니다. 먹고 싶었지만 참고 참고 갔읍니다. 그러다가 우리형제들은 몇개만 따서먹 자고 누가 먼저 제의했는지 모르지만 작정을 하고 길모퉁이 돌아가면서 형 이 시키는 대로 몇개를 따서 옷속에 숨겨가지고 천천히 형이 있는데로 갔 읍니다. 아마도 형 둘은 망을 보고 셋째인 저와 막내가 두개씩 따온것 같 았습니다. 그리고 한참을 가다가 하나씩 먹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형제들 못쓰겠구만 ]하시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네요. 모두 건전하게 자 라 모두들 각자 맡은일을 열심히 하는 사회인이 되었으니 안심하십시오. 큰형은 지금 이 하이텔에서 열심히 공병우박사 뒤을 이어 프라자란에서 열 심히 한글사랑운동을 하고 계시고 막내녀석은 교통행정학박사가 되서 가 끔 T.V에도 자주나오는 유명인사가 되어 있습니다. 둘째형도 노동부산하기관에서 공인으로서 열심히 일하고 있고... 이제 형제들 모두 40대를 넘어 큰형님이 50대로 접어드는 나이가 되어 열 심히 사회활동을 하고 있죠. 참외서리하며 외가집가던 형제들 이야기이었 습니다. 셋: 외가집에서 여름방학이면 찾아가던 우리 외가집도 농사짓는 집이라 우리집과 다를건 없지만 우리가 도착하는 날이면 외할머니는 보리 한자루를 들고 과수원으 로 직행하셨읍니다. 외손자들에게 복숭아나 실컷 주려고 하시는 마음에서 였읍니다. 보리한자루와 복숭아를 한자루를 바꿔서 머리에 이고 돌아오시 면 우리는 이가 시도록 복숭아를 실컷 먹었습니다. 그당시는 돈도 없고 쌀도 없어서 여름에는 보리가 바로 돈이었습니다. 외할아버지는 특히 우리들을 참 귀여워 하셨던것으로 기억합니다. 우리를 모아놓고 예의범절을 잘하라라고 교육도 하시고 농담도 무척 좋아하셨습니 다. 몇일을 놀다가 싫증 나면 산너머에 사는 이모네로 또 그옆의 이모네 로 하루하루 묵어가면서 이종사촌들끼리 놀고 먹고 싫증이 나면 우리들은 다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집에 돌아올때는 그래도 귀한 외손주라고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 는 버스에 태워 보내 십오리길 걸어오는 것을 절약할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몇년이 있으면 90이되시는 외할머니는 아직도 생존해 게신데 저는 뵙때마 다 이번에는 손자 제가 용돈을 적은돈이라도 드립니다. 세월은 참 빠르고 세상이 많이도 변한것을 요즘 외가집 갈때마다 생각하게 됩니다. 외손자만 오면 보리자리 이고 달려가던 외할머니는 이제 손자도 간신히 알아보시니.... 넷: 깜깜한 여름밤에 조개잡던일 제가살던 바다는 우리에게 여러가지 갖은 혜택을 주던 곳이었습니다. 농사를 짓던 우리집은 먹을 쌀과 곡식은 적었지만 반찬은 항상 푸짐했읍니 다. 바로 앞에있는 바다에 가면 무한한 바다고기와 조개가 있었기 때문입 니다. 그래서 우리엄마도 낮에 농사일 하고 시간이 날때마다 바다에가서 찬거리를 잡아오곤 했습니다. 저도 놀이겸해서 엄마를 따라다니고 갯펄이 많은 그곳에서 구멍을 찾아 숨어있는 망둥어도 잡곤했습니다. 그리고 물이 들어 올때되면 엄마을 찾아 집에 들어오곤 했는데 여름에는 주로 밤에 바다에 갔습니다. 낮에는 퇴약볕에서 일하고 밤에는 바다에 가서 바닷물에 몸을 적시며 조개를 잡던 생각이 너무도 선명합니다. 호미하나 들고 물가운데 드러난 백사장에서 호미로 조개를 캐서 바구니 하나 가득 잡어 돌아올때면 그야말로 몸은 천근만근 되는것 같았읍니다. 그리고 다시는 밤에는 가지 않겠다고 했다가 다음에 엄마들이 가는것이 보이면 �따라가곤 했는데 여름밤 바다 는 유일한 시골아낙들의 피서지였던 것 같았습니다. 아버지는 그런 엄마를 그렇게 싫어했던것 같았습니다. 갔다가 늦게 온날 이면 맨날 싸우시던 모습이 생생합니다. 요즘에 아버님게 가끔 저희들이 핀잔을 주죠. 당신 잘 드시라고 낮에 일하고 밤에 조개를 잡으러가던 엄마 와 왜그리도 싸워냐고 하면... "니 동생들을 나몰라하고 밤에 없어지면 나혼자 어떻허란 말이냐? 그게 �싫어 가지말라고 했던거지." 하십니다. 그때만해도 아버지는 양반을 따지 시던 때라 갯놈들이나 밤에 바다에 가는거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았습니다. 당신을 망둥어 낚시에 매일 다니시면서 말입니다. 그리고 50년이 지난 지금에는 어머니는 이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사람으로 아는 애처가로 변해있습니다. 다섯: 동생업고 절벽타기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 추억중에 하나가 어린 막내 여동생을 업고 하루한나 절 바닷가 절벽에서 놀던 때가 생각납니다. 시골에는 항상 바쁩니다. 바쁠때는 어린동생을 봐주어야 하는데 제친구들 이 찾아왔습니다. 바닷가에 가서 놀자는 얘기에 나는 동생 놔두고 갈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등에 업고 친구들을 따라 나섰습니다. 남자녀석이 어 린애를 업고 노는것 옛날에는 흔히 있던 모습입니다. 그날 따라 친구녀석 들은 바닷가 멀리 멀리 까지 갔읍니다. 나의 등에서는 여동생이 울고 오 줌까지 싸고 등에서는 땀인지 녀석의 오줌인지 계속 흘러내려 모시저고리 바지는 그야말로 꼴이 아니었읍니다. 나는 녀석들을 놓칠수 없어 게속 따라 다니다 절벽타는데 까지 가버렸읍니다. 나도 모르게 어린동생을 업고 절 벽을 중간쯤 올라왔는데 올라가는것도 자신없고 내려가는것도 자신이 없어 져 버렸읍니다. 그때 처음 죽는다는 느낌이 들어읍니다. 겁이 벌꺽난 나 는 판단을 빨리 해야했읍니다. 제 체력도 한계가 있고 내려가는것은 더 위 험할것 같았습니다. 그때마침 바다물이 들어와 밑에서는 파도가 출렁이고 있었 더욱 내려가는 것은 안되었읍니다. 죽으나 사나 올라가보자 하였습니 다. 그때 어린 여동생도 위험을 알았는지 울지않고 조용히 10살먹은 오빠 등에 꼭 매달려 있었습니다. 정말로 젓먹던 힘을 다해 있는힘을다해 절벽위로 한걸음 두걸음 올라가고 친구녀석들도 그때 위험을 알았는지 도와주어 무사히 절벽위로 올라왔습니 다. 그리고 돌아오던 때는 해가 저물어 갈때 기진맥진해서 집에 돌아왔지 만 아직도 엄마 아빠는 밭에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날 이후 동생을 업고는 친구들과 다시는 놀러가지 않았죠. 내등뒤에 오줌을 싸던 그막내 여동생도 어느덧 대학을 나와 공무원으로 국립 중앙도서관에서 10년이상 근무하면서 30대중반의 주부가 되어있습니다. 그렇게 많은 추억을 주었던 그 천수만은 현대 정주영회장이 페유조선을 동 원하면서 막아버렸습니다. 우리의 영원한 바다가 육지로 변해버린 것입니 다. 세계에서 누구도 할수없는 공사를 했다고 관광버스까지 동원해서 선 전을 하던 곳입니다. 하지만 그 천수만은 바닷고기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왜나면 그곳은 여러종류의 고기가 와서 알을 까고 부화 하던 곳이었습니다. 안잡히는 고기가 없을정도로 고기가 많았던 그 천수만은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문명을 발달이 좋은점도 있지만 우리에게 많은것을 잃게도 하는것 같았습니다. 나의 영원한 친구 천수만이 다시 올수만 있다면.... 나는 만사를 제쳐놓고 뛰어가겠지마는 이제는 울타리로 꼭꼭싸인 남의 땅이 되어버렸습니다. 그저 멀발치에서만 쳐다보며 한숨을 집니다. 그리운 옛날이여... 하면서 나의 고향도 고기의 고향도 다 없어진 천수만을 생각하며 이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