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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여행기

상해 예원 옛거리와 임시정부청사

상해 예원 옛거리와 상해 임시정부 상해음심점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예원 옛거리와 임시정부자리를 관광하기로 하고 버스로 이동하였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상해거리... 아직도 공사중인 건물들이 많고 정리가 안된 느낌이 든다. 한국,일본, 중국, 어찌보면 똑같은 문화를 가진 국가들이다. 옛날에는 문화가 중국에서 한국으로 일본으로 건너갔지만 지금은 그 반대현상이다. 중국사람들은 목욕을 안한다고 한다. 생활수준이 목욕탕이 없는 탓도 있지만 그들의 성격에서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목욕에 관련된 유머 한마디를 하려한다. 돼지우리에서 누가 오래 견디나 일본,한국,중국사람이 경쟁을 했다고 한다. 가장 먼저 일본사람이 돼지우리에 들어갔다. 조금있다가 기절해서 들것에 들려나왔다. 그다음 한국사람이 들어갔다. 한시간을 버티고 나왔다. 맨마지막으로 중국사람이 들어갔다. 한참이 지나도 중국사람이 나오지 않더니... 오히려 돼지가 한마디 하면서 뛰쳐나왔다. “아~~ 되게 냄새나서 참을수 없당” 이곳저곳이 건축현장이고 정리가 안되어 복잡하고 지저분하다. 급할게 없는 그들의 만만디문화.... 한국사람의 빨리빨리문화... 일본사람의 정리정돈문화... 나름대로 장점과 단점을 가진 3국의 문화... 비교가 되는 흥미로운 문화들이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상해의 예원에 가까이 가면서 중국의 노점상인들이 접근한다. “싸다 만원” “싸다 천원” 한국사람이라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따라다니며 물건을 사라고한다. 가이드가 주의를 주었다. 가방은 항상 앞으로 매라... 앞으로 매면 자기것이고 옆으로 매면 반만 내것이고 뒤로 매면 중국사람 것이다. 그래서 가메라를 앞으로 매고 사람숲을 헤쳐가며 예원으로 들어갔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호화스런 옛건물이 줄서있는 골목에는 사람들로 꽉차있다. 외국인들도 많이 보이는 거리 역시 관광지에 들어온 느낌이다. 예원.... 중국 정원 중에서도 가장 섬세하고 아름답다고 평가받고 있다. 예원은 반윤단(潘允端)에 의해 명나라 가정(嘉靖) 연간 1559년 개인 정원으로 만들기 시작하여, 1577년에 완공되었는데, 거의 20년이 걸렸다고 한다. 예원은 명조의 관리였던, 그의 아버지 '반은(潘恩)'을 기쁘게 하기 위해 만들기 시작했는데, 완공이 되었을 때, 그의 부모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고 그 자신도 몇 년 살지도 못하고 병으로 죽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부자 3대를 못간다고 주인이 몇 번이 바뀌었다. 건립 후 상인이 매입을 하여 1760년까지 방치되어 있다가 , 1842년 아편전쟁 이 일어나자, 영국군이 이곳을 5일간 점령했다고 한다. 태평천국의 반란동안 황군에 점령되었다가 다시 1942년 일본군에 의해 심하게 손상을 입었다. 중국에서 반일감정이 가장 많은 곳이 상해사람들이다. 그러다가 1956-61년에 상하이 시 정부에 의해 보수되었고, 1961년에 일반에 개방되었다. 1982년에 국가 단위의 문화재로 공표되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주요 건물 오늘날 예원은 2만평방 미터의 면적을 가지고 있으며, 수저우 정원 스타일의 6개의 구역으로 되어있다. 일본의 건물, 정원들이 이런곳에서 보고 모양을 비슷하게 한발 더 좋게 만들어 놓지않았나 하는 느낌을 갖는다. 상해는 평지에 있는 도시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해발 12미터의 이곳의 작은 사람이 만든산이 최고 높은산이다. 언덕이 하나도 없는 도시... 상해를 중심으로 이백킬로 반경으로 산이 없다고 한다. 참으로 신기하다. 그래서 그들의 만만디 문화가 탄생되었는가? 이곳에서 도보로 20분거리에 있는 임시정부청사.... 걸어가면 20분이고 차로가면 30분이다. 그만큼 상해거리는 복잡하기 그지없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임시정부청사에 도착했다. 차를 주차시킬곳이 없어 버스는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우리가 관람을 끝낼때 다시 온댄다. 수차의 이전을 걸쳐 1926년 보경리 4호 로 옮겨왔다고 한다 1932년 5월 홍구공원 윤봉길의사 폭발사건이 있은후 부득이 상해를떠났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집에서 7년간 공무활동을 하였다. 이곳이 바로 한국 임시정부가 상해에서 사무활동을한 시간이 가장길고 지금까지 가장 완전히 보존된곳이다. 좁은 골목에 자리잡은 나무로 된 집안에는 1층은 비디오 상영 2-3층은 전시실로 되어있다. 김구선생의 흉상이 보인다. 일제가 망하고 남북한 갈라지는 것을 볼 수없어 귀국을 미루다가 결국은 선생이라는 이름으로 귀국한 진정한 애국지사.... 남한의 친미파들이 그의 귀국을 싫어하기도 하였다. 마음이 숙연해진다. 특히 윤봉길의사의 초상화앞에선 눈이 뜨거워졌다. 예산에서 오래살아온 난 윤봉길이 예산출신이라는 것에 큰 자부심을 갖고있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후 당시 국민당 장개석 총통이 "중국의 백만 대군이 해내지 못한 일을 한국의 한 청년이 해냈다"면서 감탄했고 이 일을 계기로 중국에 있던 김구선생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국의 인정을 받음과 동시시 많은 지원을 받게 된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곳저곳 옮겨다디던 임시정부... 배고픔으로 영양실조가 되면서 까지 독립운동을 한 임시정부... 김구선생의 장남은 영양실조로 독립운동 와중에 잃었다고 한다. 옛날에는 사진을 찍게했는지 모르지만 사진을 삼가 해달라는 안내문이 있어 사진을 찍지 않았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독립운동을 한 분들의 사진을 보며 그저 멍하니 눈물 한망울이 떨어졌다. 지금 이렇게 잘사는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너무 흥청망청 쓰고 자기 이익만을 위해 투쟁만을 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여행중에 상해의 임시정부... 초라하고 보잘것없은 곳이지만 느낌은 한아름을 준다. 중국여행의 필수코스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뜨거워지는 가슴을 진정하고 상해시의 상징 동방명주로 향했다.. 줄서기가 많으면 관람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가이드의 말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그곳으로 향했다. 다음은 동방명주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