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족들 어머님 영정앞에 모여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6남매 가족, 외삼촌, 이모가 특별히 참석하셔 고생을 하셨습니다.
어머님 관을 땅속에 묻고 흙을 덮고 있는 중입니다.
이제 땅속에서나마 우리 형제는 사는 모습을 지켜봐 주시옵서소...
위사진은 전날 태국인 인부가 땅을 파기 시작하는 순간입니다.
아버님이 묻혀있는 봉부늘 파기 시작합니다.
위사진은 어머님을 땅속에 모시고 이곳까지 올라온 손자 손녀딸이 모두 모여 사진찰영을 했습니다.
참석하지 못한 손자 손녀는... 대학병원 의사로 근무하고 있는 은별이와 작은형수 병간호때문에 병원에 있는 중구, 애들이 따라와 산소까지 못올라온 솔미가 빠진 것 같습니다.
이사진은 어머님 관을 땅에 내리기전 비가 와서 고여있는 물을 제 사위가 퍼내고 있는 장면입니다.
역시 일꾼다운 모습으로 제일먼저 땅에 내려가 물을 퍼냈습니다.
이런 사위가 있기에 어머님을 잘 모실수있었습니다.
막내이모...
이모 6명중 유일하게 산소까지 올라와 언니 가는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한달에 한번씩 언니집에 반찬을 해오고 인사를 하던 이모입니다.
언니가 아니라 어머님처럼 언니를 모시던 막내 여동생입니다.
내 남동생과 나이가 똑같아 어려서는 외갓집에 가면 같이 친구처럼 놀기도 하던 이모였습니다.
관을 묻고 가장 선도적으로 고생하신분이 외삼촌입니다.
외삼촌은 시골에서 일한 경험을 살려 삽이다가 서가래처럼 줄을 달아 작업을 쉽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우중에 고생하신 외삼촌... 큰누님을 제대로 마지막 잘 모셨습니다.
이사진은 태국 일꾼들이 전날 어머님 묻힐 자리를 파고 있는모습입니다.
이제는 한국에 일할 일꾼들이 없어 외국인들이 자리를 잡고 힘든일을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11월28일 일요일 오후 4시경...여동생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울먹임과 함께 들려오는 어머님의 임종소식, 작은오빠에게 연락을 안했다며 연락하라고 하더군요.
작은형님에게 전화를 거는 순간 저도 울컥하며 형님에게 어머님 돌아가셨어 하며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남자들은 세번 운다고 하지요.
태어났을때와 부모님 돌아가셨을때, 배우자가 떠났을때라고 들은 것 같은데 나도모르게 뜨꺼운 눈물이 흘렀습니다.
올해나이...93세 어떻게 보면 장수를 하셨습니다.
일주일에 한번씩 꼬박 올라가 뵙기를 2년6개월 하였습니다.
혼자서 운동하시다가 못하신지 그렇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평소에 당신의 건강관리에 철저하시던 어머님은 75세에 뇌출혈이 와서 순천향병원에서 몇개월입원하시고 그런대로 회복운동으로 일상생활은 하셨습니다.
어머님의 예로보면 70대부터는 건강관리를 철저히 해야한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 같습니다.
큰형님이 75세이시니 큰형님을 18세 꽃다운 소녀의 나이에 낳고 20살에 작은형님, 23세에 저를 낳은 셈입니다,
일제시대 어머님의 나이때 한참 정신대로 끌려가던 시대였습니다.
그걸 피하려고 딸들을 조혼시키는게 당시 유행이었는데 바로 어머님의 경우입니다.
동네에서 정신대로 끌려가기로 내정되어 있는 상태에서 아버님과 급히 혼인을 서둘렀다는 이야기입니다.
생생한 부모님의 증언이 정신대의 강제동원을 말해줍니다.
큰딸로 태어나 아래로 동생이 9명이 있었는데 당시 의료수준으로 외삼촌과 이모2명를 잃고 이모5명과 외삼촌이 6명이 생존해서 살아가셨습니다.
장레식장에서 셋째이모가 오셔서 30분을 오열하시는 바람에 주위사람들을 안따깝게 했습니다.
셋째이모는 유독 언니를 좋아 하시고 존경하셨습니다.
셋째이모 큰아들이 미국 아트란타에 이민가서 살고 있는데 부모님이 건강하실때 이모부부와 부모님이 그곳에 가서 3개월동안 머물기도 했었습니다.
그런 기둥같은 언니가 저세상으로 떠났다고 생각하니 오열을 하신것 같습니다.
어머님을 옛날부터 알고 지내던 분들이 말씀하시더군요.
천사같이 마음씨가 고우시고 남들을 누구보다 배려하시던 분이라고요.
그런대로 우리집은 잘살던 집이라 동네 어려운사람들을 많이 도와주며 살았던 것 같습니다.
몸과 마음이 그런대로 성할때는 모든 것이 자식이 먼저였습니다.
먹을게 생겨도 당신은 먹지 않아도 자식부터 챙겨주시던 어머님...아마도 세상의 모든 엄마들의 마음일겁니다.
6남매 자식들은 그런대로 자부를 합니다.
2년6개월동안 꼬박 일주일에 한번씩 찾아가 보살펴드리고 최근 몇개월은 기저귀까지 갈아드리며 요양원을 보내지 않고 사시던 집에서 임종을 하셨습니다.
사람이 병들고 허약하면 무슨일이 벌어지는지 저도 어머님을 통해서 깨닫습니다.
거의 최근에는 식욕이 없으셔 간신히 밥까지도 믹서기로 갈아서 영양식과 함께 드리곤 하였습니다.
돌아가시는 날은 막내여동생이 있었는데 하루전부터 아무것도 거의 안드시고 드시더래도 삼키지 못하시더랍니다.
그러다가 드시겠지 하며 요양사가 와서 뭔가를 가지고 가서 드시나 했더니 조용히 눈을 감으셨다합니다.
고통없이 그런대로 편안히 가신 것 같습니다.
검안의사의 진단은 완전 노환으로 기력이 없어 돌아가셨다고 하였답니다.
장례식장은 부천 세종병원이었습니다.
어머님이 평상시 다니시던 병원이고 정기적으로 약을 타오던 곳입니다.
우리형제들도 이제 칠순이 넘어가고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들이 저세상으로 갈 차례가 되었습니다.
최근 둘째형수님이 많이 아프십니다.
혈액암비슷한 병으로 몸이 점점 마비증세가 와서 혀로 음식을 삼키지 못해 관을 설치하여 식사를 할정도로 악화되어 작은형수님은 어머님의 장례를 지켜보지 못했습니다.
인간이 태어나 때가되면 누구든지 죽음은 피할 수
없습니다.
장례식장에서 발인날을 보니 하루종일 비예보가 있었습니다.
강수확율 백퍼센트라 전날 준비를 해야만 매장을 할수있는 상황이라 저는 일찍 산소가 있는 덕산으로 출발했습니다.
평상시에 화장은 싫다는 말씀을 입버릇처럼 말씀을 하셨기에 아버님곁에 매장을 결정했죠.
덕산에 사는 친척에게 인부 동원을 부탁했지만 여의치않아 덕산인력사에 찾아갔더니 마침 태국에서 온 노동자 두명이 있었습니다.
포크레인이 올라갈수없는 상황이 되어 인력으로 준비할수밖에 없었습니다.
내일 비예보에 오늘 마치지 못하면 발인날 애을 먹을 것이 뻔했습니다.
인부들을 산에 도착해서 하려하니 장갑을 가지고 안왔다는 이야기에 다시 산에서 내려가 장갑을 사오고 급하게 올라오다보니 간식을 안사와 간식을 사러가고 점심시간 안으로 될까했더니 땅을 파며 돌같이 단단한 흙이 나와 시간을 지체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점심을 소머리국밥을 포장해서 가져와서보니 곡괭이같은 장비없이는 도저히 땅이 파지지 않는다하여 곡괭이 가지러 다시 내려갔습니다.
그런대로 태국출신 일꾼들이 잘 해줘서 어머님 들어갈 자리를 마련해놓은 시각이 오후 두시반경이었습니다.
땅을 판자리를 가져간 천막으로 덮으려 했더니 한참이 모잘랐습니다.
일단 일꾼들과 산에서 내려와 돌려보내고 저는 비닐을 사서 다시 산소로 올라갔습니다.
비닐로 그런대로 다 덮어놓고 내려오니 세시가 넘어버렸습니다.
그런대로 높은 산소, 꼬박 4번을 올라갔다 내려갔다를 한 셈이 되버렸습니다.
장례식장에 올라와 저녁때오는 제 친구들이마나 만날수가 있었습니다.
발인하는날은 일기예보대로 새벽부터 세차게 왔습니다.
7시 넘어 가족들은 영구버스에 타고 저와 아내는 승용차로 산소로 향했습니다.
비가 많이 와서 산소가 물이 들어 갔으면 어쩌나 하는 염려가 있었는데 역시 비닐이 터지면서 어느정도 차있지만 퍼내면 될 정도였습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물이 많이 안차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제 사위가 바로 나서서 물을 퍼내더군요.
장화바지를 입고 올라가더니 바로 그 효과를 발휘하는 겁니다.
평소에 애들을 데리고 캠핑을 가는데 장화바지를 준비한게 이때 사용하려 했던 것처럼 된 것입니다.
제 딸녀석도 똑같은 장화바지를 입고 올라와 흙을 덮을때 밟는 작업에 힘을 보탰습니다.
나중에 끝나고 나서 모두 사위 잘 얻었다고 가족들이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물을 퍼내고 흙을 깔고 어머님 관을 그대로 매장했습니다.
비오는 와중에 그런대로 잘 끝낸 것 같습니다.
전날 제가 고생한 보람을 느끼는 순간이었습니다.
가족들, 이제 중년으로 변한 손자손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땅속으로 가신 어머님...그렇게 가족들 보는앞에서 편안히 자연의 품으로 돌아갔습니다.
자연에서 태어나 자연으로 돌아가는 자연의 이치. 그게 사람들의 삶입니다.
찰나의 삶을 살다간다지만 어머님의 일생은 그렇게 순탄지만은 않았을 것입니다.
일제시대 정신대로 끌려갈 상황에 아버님과 조혼, 6남매을 키우고 학교를 보내느라 갖은 고행길의 서울생활, 6남매를 대학까지 모두 졸업시킨 부모는 그리 흔지 않은 시대에 그걸 해내셨습니다.
이제 혼이나마 우리들 곁을 지키실 겁니다.
시대는 자식들 시대가 아니라 손자들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우리 형제들은 모두 현직에서 내려와 건강이나 챙기는 시대가 되어버렸습니다.
손자들이 열심히 살아서 기반을 잡으로 후손들을 잘 키워내기만을 기대할 뿐입니다.
어머님이 열심히 자식들을 키운 것처럼 그 손자들도 자신들의 자식들을 잘 키울 것입니다.
어머님...편안히 저세상에서 지켜봐 주세요
이제 자식들도 어머님처럼 허약해질 나이가 되었습니다.
우리 자식들이 또 우리를 어머님처럼 돌봐주다가 땅속으로 갈겁니다.
그때 또 저세상에서 다시 만나길 상상해봅니다.
허약해진 어머님이 아니라 생기 넘치는 젊은 엄마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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