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오빠들 글도 같이 넣고 싶다고 해서 내가 생각하고 기억나는 어머님에 관한 글을 쓰고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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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92세, 어머님은 이제 정말 쇠약하시다.
대소변을 제대로 못가려 기저귀를 차고 사시고 있다.
어찌보면 요양원에 가셔야할 상황이지만 요즘 코로나로 요양원에 가시면 돌아가실때 보게되다보니 자식들이 교대로 와서 돌봐드리고 있다.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다시 간난아이로 돌아가는 것 같다.
기억력도 약해지시고 걸음도 못걸으신다.
기저귀가 없으면 생활을 못하시니 정말 간난아이 상황이다.
고목나무가 조금씩 쓰러지듯이 인간도 나이를 먹으면 하나 둘씩 무너지기 시작한다.
작년 이맘때까지만 해도 부천 중앙공원을 스스로 휄체어를 밀고 걷고 하셨는데 이제는 그저 앉아서 계시고 바람만 쇠이고 들어온다.
아마도 올해가 고비일거라 생각된다.
사람은 누구나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나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게 세상사의 상식이다.
우리 6남매 그런대로 아직 모두 건강하게 잘 살고있다.
둘째형이 전립선암으로 5년전에 수술을 받으셨고 두 여동생은 유방암이 있었는데 다행히 모두 잘 버티고있다.
올해 70대 중반이 된 큰형님 아직도 한글운동가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계시다.
둘째형님 산업인력공단 퇴직후 암투병하시면서 잘 지내시고 있다.
암수술한지 5년이 지나가기 이제 완치가 되었지 않나 생각한다.
그리고 나역시 산업전사로 평생을 보내고 제2의 인생을 꿈꾸고있는 올해 70이 된 노인초년생이다.
만 65세까지 제조업 기업에서 근무했으니 산업전사중에 전사라 생각한다,
대한민국의 경제를 온몸으로 짊어지고 살아왔지 않나 생각한다.
내 밑의 남동생은 교통안전공단 임원으로 있다가 퇴직해서 여러가지 제2의 꿈을 위해 노력하지만 만만치 않다.
동생은 술을 좋아해서 문제다.
특히 막걸리를 좋아하는데 거의 매일 취해 있는 것 같다.
그게 그의 제2인생을 망치고 있는 것 같다.
교통안전공단 이사장 공모를 몇번이나 했지만 고배를 마셨다.
난 4형제중 유일하게 술을 한방울도 최근들어 안마신다.
운동이나 밭에서 일을 하고 목이 말라있어도 술생각은 나지 않는다.
집에서 아내가 막걸리를 좋아해서 항상 냉장고에 있지만 난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
전에 직장 다닐때는 어쩔수없이 못먹는 술을 입에 댄적이 있지만 퇴직후에는 거의 마시는 일이 없다.
항상 맨정신으로 살아간다는 것,,, 그게 중요한 건강의 비결같다.
우리형제들중 아래로 두 여동생이 있다.
큰여동생은 정말 효녀다.
그녀석이 아니었으면 어머님은 벌써 요양원 신세를 지고 계실 것이지만 큰여동생의 지극정성으로 어머님이 지금까지 집에서 버티시는 것 같다.
마음씨가 정말 비단결같이 고운 여동생으로 생각된다.
막내여동생은 얼마전에 서울의 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학구파 공무원이다.
문화체육부 공무원으로 평생을 국립 중앙도서관에서 사서업무를 하면서 근무하면서 보냈다.
올해는 퇴직을 앞두고 일년동안 근로휴가를 보내며 그동안의 고생을 보상받고 있다.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막내딸로 어머님에 대한 기억을 살리며 책을 내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어머니....
일제때 태어나셨고 한국전쟁을 몸소 체험하고 6남매 키우느라 서울로 이사와서 갖은 고생을 다하셨다.
아버지도 돌아가시기전 자서전을 몇페이지 쓰시고 돌아가셨는데 그 자서전에도 언급한 이야기가 있다.
일제는 어린처녀들을 잡아다가 전쟁터 위안부로 끌어가고 전쟁물자 생산공장에 보내느라 동네를 돌아다니며 어린쳐녀들을 잡아들였단다.
그래서 나이가 좀 들었다하면 모두 릴찍 조혼을 시티는게 그시대의 풍습이었다.
그래서 어머님은 16살에 아버지에게 시집을 왔다.
지금으로 이야기하면 고1때 결혼한 것이다.
17세에 큰형님을 낳으셨고 20세에 작은형님 22세때는 나를 낳으신 것이다.
지금으로 이야기하면 고등학생때부터 애를 낳으셨으니 그시대의 암울한 이야기다.
아들을 잘 낳다보니 시아버지의 사랑은 극진했던 것 같다.
어머님은 가끔 내 할아버지 즉 시아버지 이야기를 혔는데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존경하고 훌륭하신 분이라고 말씀을 하신다.
일제 시대지만 할아버지는 소장사를 하셔서 돈을 많이 버셔 그시대에는 잘 사는 집이었다.
동네에서 가장 잘사는 부자로 넉넉한살림을 하며 사셨는데 이웃들에게도 항상 베프는 부자였다고 한다.
땅도 많이 사시고 항상 머습을 두고 농사를 지었다.
할아버지는 큰재산을 큰아들에게 많이 넘겨주셨다.
작은아들인 아버지에게는 지금부터 버는 돈은 너를 위해서 쓰마 하셨다는데 그만 환갑을 앞둔 나이에 병이 찾아와 돌아가셨다.
그때가 작은형님이 태어나고 일년이 되었을때 쯔음이라고 한다.
할아버지는 외아들로 커서 큰댁에 두아들, 작은아들에 두아들이 있다면서 이제는 어느 집안에도 지지않는 든든한 손자들이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당시 큰아버지, 아버지는 읍내의 초등학교에 들어가 졸업하시었다. 당시 부자가 아니면 할수없는 일이다.
아버지는 서울로 유학을 가고싶어 할아버지에게 졸아댔지만 허락하지 않았다.
아들이 둘만 있는데 타항에서 무슨일이 있을지 걱정이 되어 능력은 되지만 더이상의 학업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아버지는 당시 고가인 자전거를 팔고 집에 있는 돈을 몰래가지고 편지 한장 써놓고 서울로 올라온다.
혼자 꼭 상급학교에 들어가겠다 결심을 하고서 말이다.
서울로 올라온 아버지는 당시 일본인이 경영하는 가게에서 점원으로 일하며 그꿈을 이뤄가려하다가 실수로 집으로 끌려오게 된다.
부모님이 걱정을 할까봐 편지를 한장 보낸게 덜미가 되어 큰아버지에게 잡혀서 집으로 내려와 상급학교 진학꿈을 접는다.
그리고 일본 관동군으로 강제 입대를 하게 된다.
당시 좀 배운사람들은 모두 일본군으로 끌려가는데 아버지 그중의 한사람인 것이다.
관동군으로 끌려가 소련과 전쟁하는데 군인으로 있다가 일본의 항복으로 소련군의 포로가 된다.
그곳에서 풀려난 아저지의 이야기는 내블로그에 옮겨 실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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