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여동생이 낼 책에 넣을 어머님에 관한 글 두번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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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관동군으로 끌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돌아온 아버지. 해방후 아들이 돌아오길 학수고대하던 할머니는 매일 해미 버스정류장에 나가 하루종일 아들이 돌아오는걸 마중나갔다고 한다.
몇개월을 그렇게 이어오던 할머니의 해미정류장 마중은 어느날 갑자기 새벽에 아버지가 대문을 열고 들어온다.
자다가 꿈인가 생시인가 온가족의 기쁨은 이루 말할수 없었다고 어머니는 회상한다.
아버지는 해방후 몇개월후에 돌아왔으니 이미 한반도가 반으로 갈라져 있었다.
남한쪽은 일본인들의 수하에 있던 사람들 세상이었고 북한은 일본인들이 반병신되어 돌아갔다고 한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난다.
북한군의 압도적인 화력앞에 남한은 저참하게 무너져 내린다.
해미에도 북한군이 내려와 북한세상이 되었다.
그때 아버지는 떠밀려서 청년위원장이 되었는데 다시 수복이 되었을때 이미 죽은 목숨이었지만 기적적으로 살아남으셨다.
이유인즉, 해미 면사무소에서 근무하던 초등학교 동창생을 북한군 세상일때 우리집 마루밑에 숨겨두며 몇개월 밥을 주며 살려주었던 것이었다.
어머님은 그때를 가끔 회상하시는 말씀을 하신다.
외간남자가 마루밑에서 살고있으니 멀마나 불편한지 이루 말할수 없었다고 한다.
밥을 해서 마루밑 구멍에 넣어주고 하던 일을 가슴떨리며 주었다고 한다.
발견되면 부모님은 배신자로 바로 처형되는 시대였다.
수복이 되고 세상이 다시 원상되었을때 이번에는 아버지가 공산당 청년위원장이었다고 붙들려 들어갔다.
그때 면사무소 친구가 이친구는 절대 공산주의자가 아니고 억지로 시켜서 된사람이라고 말하며 내 생명의 은인이라며 풀어줘야한다고 설득하여 바로 살아남았다.
일제시대에는 관동군으로 끌려가 죽을고비를 넘기고 한국전쟁중에는 공산당의 노리개가 되었다고 죽을고비를 넘긴 아버님... 정말 파란만장한 시대에 살으셨다.
누구나 시대에 어느사람은 행운을 얻게되고 누구는 희생양이 된다.
그시대에는 정말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우리나라 역사도 너무나 드라마틱하게 전개되었다.
조선이 일본에게 망하고 일본이 망하면서 한반도는 둘로 갈라지고 그 소란한 역사에 같은 민족끼리 죽이는 전쟁이 일어났다.
전에 kbs 이산가족 찾기에서 그 아픈 전쟁의 이야기는 다시 나와 우리 국민들을 눈물바다로 만들었었다.
피난길에 남매간 헤어져 반백이 되어 만나는 이야기는 지금도 눈물없이는 듣지 못한다.
이념전쟁이 거의 없는 이시대에 세계에서 유일하게 갈라져있는 한반도... 참으로 불행하기 그지지없다.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그 오랜역사를 살아남았는데 아직도 눈물이 남아있으니 말이다.
전쟁도 끝나고 이제는 6남매 생존이야기로 들어간다.
부지런하고 인정많은 어머니는 밭농사와 바다에 나가서 갯것을 잡아오는게 일과였다.
특히, 우리가 살던 동네는 천수만 바다의 풍부한 어장을 끼고 있어 바다에만 나가면 조개며 해산물을 풍부하게 해주었다.
배가 고프게 살았던 기억이 별로없는게 아마도 풍부한 해산물 덕분이 아닌가 생각된다.
가을철되면 아버지는 바다에 나가 망둥어를 한바구니씩 낚시로 잡아오셨다.
어머니 그 망둥어를 손질해서 양지바른 바당에 널어놓고 마른 망둥어는 겨울철 호박이랑 같이 찌개로 반찬으로 나왔다.
특히 새우가 바다에서 많이 나왔는데 새우도 잡아오면 삶아 마당에 널어놓고 겨울철 양식으로 식탁에 놀라왔다.
가을철이면 마당에 새우와 망둥어 건조시키는 모습이 지금도 눈이 선하다.
어머님은 바다생선의 요리사로 우리 어린아이들의 입맛을 사로잡곤 했다.
배를 가진 사람들이 잡아논 생선은 해미장에 가기전 꼭 우리집에 먼저 들렸다가 갔다.
남들부도 조금은 잘사는 집이다보니 무겁게 생선을 이고 5킬로 해미장까지 가는 것보단 좀 싸게 ㅇ리집에 팔고 가는 것이었다.
대문앞에서 어머니와 생선아줌마의 흥정을 하던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그렇게 수만가지의 생선이 나오던 천수만은 현대 건설에 의해 사라진다.
그당시 초등학생 어린나이 내가 바다에 나가도 갯벌에서 망둥어와 새우등을 한가득 바구니에 잡아오곤 했다.
한번은 갯별 고랑에서 구멍을 찾아가며 손을 넣고 망둥어를 잡곤 했는데 고랑에 조그만 구멍에 손을 넣으면 망둥어 머리가 손에 잡혀 끄집에 내어 잡곤했더.
한번은 망둥어라 생각하고 끄집어 내곤 소스라치게 놀랐다.
처음보는 바다뱀이었다.
들판에서만 사는줄 알았는데 바다뱀에 바다에 있는줄 처음 알았고 보는순간 소름이 끼칠정도로 놀라 그다음부터는 갯고랑에서 망둥어 잡이는 끝이 났다.
생태보고의 산실이 바다를 육지로 만드는 건척공사롤로 사라진 것이다.
그 바다를 막지않았더라면 지금 그 천수만은 세계넉은 관광지로 수산물의 보물지구로 남아있을 것이다.
내가 어릴적 놀던 그 풍성한 바다가 사라져 지금도 그앞 방조제 도로를 달릴때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막지 말았어야 하는데 그때는 쌀생산이 최고로 여겨으니 어쩔수없는 일이다.
형들과 우리형제들은 초등학교를 다니며 상급학교에
에 진학하려한다.
그당시만 해도 초등학교 졸업하면 상급학교 진학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나같은 경우 당시 고교진학을 위해 주변지역보다 서울지역으로 지원방향을 결정했다.
인천 인하공대에 있는 5년제 공전을 진학하기로 한 것이다.
큰형님이 원서를 준비해서 가져오고 인천 인하공대에 가서 시험을 보고 합격했다.
내진학을 계기로 아버지는 중대한 결심을 하게된다.
6남매가 제대로 학교에 다니기 위해서는 서울로 이사가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낸 아버지는 주위사람들이 거지된다고 하는 말을 뒤로 한채 서울로 이사를 감행한다.
이때 큰역할을 한 사람이 당시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던 큰형님이다.
서울에서 대학생활 2년을 경험으로 우리가족의 정착지를 서울 상도동으로 결정한다.
숭실대 근처에서 정착을 한게 나와 작은형님이 그대학 출신이 된 인연이다.
아버지는 서울에서 장사를 시작하면서 처음에는 철물점을 생각했었다고 하신다.
철물은 안팔려도 썩는물건이 아니라 두고두고 팔수있는 물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큰형님은 당시 쌀이 우리나라 주식으로 유통이 잘되고 돈회전이 빠른 아이템으로 그것으로 하자 아버지를 설득해서 미곡상을 시작하였다.
그것은 적중해서 돈을 벌게 되었다.
아버지는 시골에 내려가 방앗간에서 쌀을 사가지고 트럭에 싣고와 일부는 우리가게에 나머지는 다른가게로 넘기는 도매업을 같이 하였다.
시골 방앗간을 찾아다니며 쌀을 구매해서 한트럭을 사가지고 새벽에 올라온다.
일부 우리집에 팔 물건만 내려놓고 미리 예약해놓은 여러 미곡상에서 차가 이동하면서 내려놓고 간다.
한번은 새벽에 올라오다가 쌀을 실은 트럭이 졸음운전으로 차가 뒤집히는 사고를 당하셨다.
다행히 큰 사고는 아니어서 다치시진 않았지만 큰사고로 이어질뻔한 사고였다.
그당시 조수석에 타고 있는 사람은 서산지역에서 자수성가로 성공한 사업가, 국회의원까지 지낸 청년이었다.
일주일에 한번꼴로 시골로 내려가면서 허리에 돈다발을 가득 차고 가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당시 대학생이던 작은형과 나는 밤이면 낮에 풀어논 미곡상을 찾아다니며 수금을 하였다
지금도 밤마다 아버지와 큰형님은 밤새 돈을 세던 모습이 생생하다.
3형제가 학업과 아버지 미곡사업을 같이 동행하는 일은 젊은 청년시절의 한 일과였다.
벌은돈으로 땅을 사고 집을 사며 재산을 불려서 서울에 집도 장만하고 6남매가 모두 대학을 좋업하는 댜역사를 만들었다.
큰형님과 아버지의 작품이 한 명품이 된 가족의 역사라고 생각된다.
그 중간에 어머님의 희생은 실로 대단하다.
큰형님과 아버님의 의견충돌에는 어머님은 항상 자식편이었다.
초등학교도 못다닌 어머님은 한글을 못 깨우쳐 그게 나는 항상 마음에 걸렸다.
마침 우리집에 일하는 내또래의 청년도 초등학교를 데대로 못다녀 한글을 모르고 있었다.
마침 상도초등학교 방과후 수업에 한글깨우침 교실이 있다해서 저녁에 그곳에 가도록 설득하였다.
같이 다니던 친척청년은 꾸준히 잘다녀 일년후에는 완전히 터득이 되었는데 어머님의 경우는 집안일을 같이 병행하다보니 완전 깨우침까지는 못갔다.
그래도 띄엄띄엄 읽는 수준까지 간게 나름대로 성공이다.
그때 맘먹고 꼭 한글을 완전히 깨우치게 못해드린게 지금도 한이된다.
이제는 한세월, 한세대가 저물어간다.
아버님은 5년전에 82세로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감하셨고 어머님이 이제 그 연세가 되셨다.
자신앞에 놓여있는 현싷을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오늘도 생명의 끈에 매달리고 싸우고 계시다.
이제 돌아가시면 덕산의 산소, 아버님 곁에 같이 묻어드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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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관동군으로 끌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돌아온 아버지. 해방후 아들이 돌아오길 학수고대하던 할머니는 매일 해미 버스정류장에 나가 하루종일 아들이 돌아오는걸 마중나갔다고 한다.
몇개월을 그렇게 이어오던 할머니의 해미정류장 마중은 어느날 갑자기 새벽에 아버지가 대문을 열고 들어온다.
자다가 꿈인가 생시인가 온가족의 기쁨은 이루 말할수 없었다고 어머니는 회상한다.
아버지는 해방후 몇개월후에 돌아왔으니 이미 한반도가 반으로 갈라져 있었다.
남한쪽은 일본인들의 수하에 있던 사람들 세상이었고 북한은 일본인들이 반병신되어 돌아갔다고 한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난다.
북한군의 압도적인 화력앞에 남한은 저참하게 무너져 내린다.
해미에도 북한군이 내려와 북한세상이 되었다.
그때 아버지는 떠밀려서 청년위원장이 되었는데 다시 수복이 되었을때 이미 죽은 목숨이었지만 기적적으로 살아남으셨다.
이유인즉, 해미 면사무소에서 근무하던 초등학교 동창생을 북한군 세상일때 우리집 마루밑에 숨겨두며 몇개월 밥을 주며 살려주었던 것이었다.
어머님은 그때를 가끔 회상하시는 말씀을 하신다.
외간남자가 마루밑에서 살고있으니 멀마나 불편한지 이루 말할수 없었다고 한다.
밥을 해서 마루밑 구멍에 넣어주고 하던 일을 가슴떨리며 주었다고 한다.
발견되면 부모님은 배신자로 바로 처형되는 시대였다.
수복이 되고 세상이 다시 원상되었을때 이번에는 아버지가 공산당 청년위원장이었다고 붙들려 들어갔다.
그때 면사무소 친구가 이친구는 절대 공산주의자가 아니고 억지로 시켜서 된사람이라고 말하며 내 생명의 은인이라며 풀어줘야한다고 설득하여 바로 살아남았다.
일제시대에는 관동군으로 끌려가 죽을고비를 넘기고 한국전쟁중에는 공산당의 노리개가 되었다고 죽을고비를 넘긴 아버님... 정말 파란만장한 시대에 살으셨다.
누구나 시대에 어느사람은 행운을 얻게되고 누구는 희생양이 된다.
그시대에는 정말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우리나라 역사도 너무나 드라마틱하게 전개되었다.
조선이 일본에게 망하고 일본이 망하면서 한반도는 둘로 갈라지고 그 소란한 역사에 같은 민족끼리 죽이는 전쟁이 일어났다.
전에 kbs 이산가족 찾기에서 그 아픈 전쟁의 이야기는 다시 나와 우리 국민들을 눈물바다로 만들었었다.
피난길에 남매간 헤어져 반백이 되어 만나는 이야기는 지금도 눈물없이는 듣지 못한다.
이념전쟁이 거의 없는 이시대에 세계에서 유일하게 갈라져있는 한반도... 참으로 불행하기 그지지없다.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그 오랜역사를 살아남았는데 아직도 눈물이 남아있으니 말이다.
전쟁도 끝나고 이제는 6남매 생존이야기로 들어간다.
부지런하고 인정많은 어머니는 밭농사와 바다에 나가서 갯것을 잡아오는게 일과였다.
특히, 우리가 살던 동네는 천수만 바다의 풍부한 어장을 끼고 있어 바다에만 나가면 조개며 해산물을 풍부하게 해주었다.
배가 고프게 살았던 기억이 별로없는게 아마도 풍부한 해산물 덕분이 아닌가 생각된다.
가을철되면 아버지는 바다에 나가 망둥어를 한바구니씩 낚시로 잡아오셨다.
어머니 그 망둥어를 손질해서 양지바른 바당에 널어놓고 마른 망둥어는 겨울철 호박이랑 같이 찌개로 반찬으로 나왔다.
특히 새우가 바다에서 많이 나왔는데 새우도 잡아오면 삶아 마당에 널어놓고 겨울철 양식으로 식탁에 놀라왔다.
가을철이면 마당에 새우와 망둥어 건조시키는 모습이 지금도 눈이 선하다.
어머님은 바다생선의 요리사로 우리 어린아이들의 입맛을 사로잡곤 했다.
배를 가진 사람들이 잡아논 생선은 해미장에 가기전 꼭 우리집에 먼저 들렸다가 갔다.
남들부도 조금은 잘사는 집이다보니 무겁게 생선을 이고 5킬로 해미장까지 가는 것보단 좀 싸게 ㅇ리집에 팔고 가는 것이었다.
대문앞에서 어머니와 생선아줌마의 흥정을 하던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그렇게 수만가지의 생선이 나오던 천수만은 현대 건설에 의해 사라진다.
그당시 초등학생 어린나이 내가 바다에 나가도 갯벌에서 망둥어와 새우등을 한가득 바구니에 잡아오곤 했다.
한번은 갯별 고랑에서 구멍을 찾아가며 손을 넣고 망둥어를 잡곤 했는데 고랑에 조그만 구멍에 손을 넣으면 망둥어 머리가 손에 잡혀 끄집에 내어 잡곤했더.
한번은 망둥어라 생각하고 끄집어 내곤 소스라치게 놀랐다.
처음보는 바다뱀이었다.
들판에서만 사는줄 알았는데 바다뱀에 바다에 있는줄 처음 알았고 보는순간 소름이 끼칠정도로 놀라 그다음부터는 갯고랑에서 망둥어 잡이는 끝이 났다.
생태보고의 산실이 바다를 육지로 만드는 건척공사롤로 사라진 것이다.
그 바다를 막지않았더라면 지금 그 천수만은 세계넉은 관광지로 수산물의 보물지구로 남아있을 것이다.
내가 어릴적 놀던 그 풍성한 바다가 사라져 지금도 그앞 방조제 도로를 달릴때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막지 말았어야 하는데 그때는 쌀생산이 최고로 여겨으니 어쩔수없는 일이다.
형들과 우리형제들은 초등학교를 다니며 상급학교에
에 진학하려한다.
그당시만 해도 초등학교 졸업하면 상급학교 진학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나같은 경우 당시 고교진학을 위해 주변지역보다 서울지역으로 지원방향을 결정했다.
인천 인하공대에 있는 5년제 공전을 진학하기로 한 것이다.
큰형님이 원서를 준비해서 가져오고 인천 인하공대에 가서 시험을 보고 합격했다.
내진학을 계기로 아버지는 중대한 결심을 하게된다.
6남매가 제대로 학교에 다니기 위해서는 서울로 이사가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낸 아버지는 주위사람들이 거지된다고 하는 말을 뒤로 한채 서울로 이사를 감행한다.
이때 큰역할을 한 사람이 당시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던 큰형님이다.
서울에서 대학생활 2년을 경험으로 우리가족의 정착지를 서울 상도동으로 결정한다.
숭실대 근처에서 정착을 한게 나와 작은형님이 그대학 출신이 된 인연이다.
아버지는 서울에서 장사를 시작하면서 처음에는 철물점을 생각했었다고 하신다.
철물은 안팔려도 썩는물건이 아니라 두고두고 팔수있는 물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큰형님은 당시 쌀이 우리나라 주식으로 유통이 잘되고 돈회전이 빠른 아이템으로 그것으로 하자 아버지를 설득해서 미곡상을 시작하였다.
그것은 적중해서 돈을 벌게 되었다.
아버지는 시골에 내려가 방앗간에서 쌀을 사가지고 트럭에 싣고와 일부는 우리가게에 나머지는 다른가게로 넘기는 도매업을 같이 하였다.
시골 방앗간을 찾아다니며 쌀을 구매해서 한트럭을 사가지고 새벽에 올라온다.
일부 우리집에 팔 물건만 내려놓고 미리 예약해놓은 여러 미곡상에서 차가 이동하면서 내려놓고 간다.
한번은 새벽에 올라오다가 쌀을 실은 트럭이 졸음운전으로 차가 뒤집히는 사고를 당하셨다.
다행히 큰 사고는 아니어서 다치시진 않았지만 큰사고로 이어질뻔한 사고였다.
그당시 조수석에 타고 있는 사람은 서산지역에서 자수성가로 성공한 사업가, 국회의원까지 지낸 청년이었다.
일주일에 한번꼴로 시골로 내려가면서 허리에 돈다발을 가득 차고 가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당시 대학생이던 작은형과 나는 밤이면 낮에 풀어논 미곡상을 찾아다니며 수금을 하였다
지금도 밤마다 아버지와 큰형님은 밤새 돈을 세던 모습이 생생하다.
3형제가 학업과 아버지 미곡사업을 같이 동행하는 일은 젊은 청년시절의 한 일과였다.
벌은돈으로 땅을 사고 집을 사며 재산을 불려서 서울에 집도 장만하고 6남매가 모두 대학을 좋업하는 댜역사를 만들었다.
큰형님과 아버지의 작품이 한 명품이 된 가족의 역사라고 생각된다.
그 중간에 어머님의 희생은 실로 대단하다.
큰형님과 아버님의 의견충돌에는 어머님은 항상 자식편이었다.
초등학교도 못다닌 어머님은 한글을 못 깨우쳐 그게 나는 항상 마음에 걸렸다.
마침 우리집에 일하는 내또래의 청년도 초등학교를 데대로 못다녀 한글을 모르고 있었다.
마침 상도초등학교 방과후 수업에 한글깨우침 교실이 있다해서 저녁에 그곳에 가도록 설득하였다.
같이 다니던 친척청년은 꾸준히 잘다녀 일년후에는 완전히 터득이 되었는데 어머님의 경우는 집안일을 같이 병행하다보니 완전 깨우침까지는 못갔다.
그래도 띄엄띄엄 읽는 수준까지 간게 나름대로 성공이다.
그때 맘먹고 꼭 한글을 완전히 깨우치게 못해드린게 지금도 한이된다.
이제는 한세월, 한세대가 저물어간다.
아버님은 5년전에 82세로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감하셨고 어머님이 이제 그 연세가 되셨다.
자신앞에 놓여있는 현싷을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오늘도 생명의 끈에 매달리고 싸우고 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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